202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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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95)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12) - 궁극의 낙관, 요셉

주께서 함께 하시는 한 어떤 곤경도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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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러코스터 인생

성경 속 인물치고 요셉만큼 오르막과 내리막이 극적으로 교차된 인생을 산 이도 없을 것이다. 요셉의 우여곡절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면서 시작된다. 야곱에게는 레아가 낳아준 10명의 형제들과 라헬이 낳아준 2명의 형제가 있었다. 야곱은 그들 중 자신이 더 사랑하던 여인 라헬이 낳아준 첫아들 요셉을 애지중지하였다. 한 마디로 요셉은 부모의 응석받이요 사랑둥이였다.

형들 눈에는 그게 좋아 보일 리 없었다. 그랬는데 요셉은 눈치도 없이 웬 꿈 얘길 해대며 그들의 염장을 질러댔다.

“내가 꾼 이 꿈 이야기를 들어 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6-7.9).

어느 형이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겠는가. 형들은 입을 모아 잔뜩 별러댄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아버지만 나타나면 요사를 떠는군. 게다가 요상한 꿈 얘기나 떠벌리고! 저 녀석만 없으면 우리 세상인데 말이야….”

형들은 결국 요셉을 사지, 곧 광야의 구덩이에 던져버려, 미디안 상인들의 손을 거쳐 인신매매의 제물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요셉은 이집트까지 끌려가 왕실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의 종이 되어 그의 집에서 일하게 된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꽃미남이었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는다. 그녀의 유혹을 끝까지 거절하던 요셉은 오히려 괘씸죄에 걸려 ‘겁탈 미수’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간다. 좋을 만하면 내쫓기고, 풀릴 만하면 꼬여든, 기구한 운명!

다시 전화위복의 기회가 찾아온다. 요셉은 옥중에서 두 관원의 꿈을 풀어준 것을 계기로, 임금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된다. 7년 풍년 후, 7년 흉년이 될 것과 그 대책까지 알림으로써 요셉은 파라오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요셉은 국무총리가 된다. 요셉의 나이 30세 때였다.

■ 용서의 기술

섭리는 묘하다. 못 만날 인연은 지척에서도 못 만나고, 만날 인연은 타향 무연고지에서도 만난다. 7년 풍년 후, 7년 기근이 가나안 땅에도 찾아왔을 때,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창세 41,57). 요셉의 형들도 이집트로 양식을 사러 왔다. 요셉은 단박에 형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재회의 순간부터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야 아버지와 막내동생도 편한 마음으로 만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었다. 여기서부터 요셉표 용서의 기술이 발휘된다.

첫 번째로, 죄의 시인을 유도한다.

요셉은 먼저 형들에게 첩자의 누명을 씌우고 사흘 동안 가둬둔다. 그러면서 그들을 계속 다그치자, 자기들끼리 수군덕대는 가운데 지난날의 죄를 시인하는 말이 나온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창세 42,21). 죄의식의 표출! 요셉이 고대하던 바였다.

둘째로, 뉘우침과 보속의 과정을 밟게 한다.

요셉은 형들 가운데 시몬을 인질로 잡아 놓고 자신과 같이 라헬에게서 태어난 친동생 벤야민을 데려오게 한다. 이어 아버지 야곱까지 만나고 싶은 속셈에서 벤야민을 ‘은잔’도둑으로 모는 자작극을 꾸민다. 형들은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죄’를 뉘우치는 발언을 한다. “저희가 나리께 무어라 아뢰겠습니까? 무어라 여쭙겠습니까? 또 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종입니다”(창세 44,16). 여기서 ‘뉘우침’과 ‘보속’의 다짐이 드러난다. 이 과정을 요셉은 꼬박 확인한다.

셋째로, 대속의 형제애를 이끌어낸다.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요셉은 다른 형제들은 필요 없고 벤야민만을 ‘종’으로 원한다고 말한다. 이에 형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대신하겠습니다”(창세 44,33 참조). 이는 대속의 요소다. 곧 자신의 희생으로 동생의 죗값을 치르겠다는 자발적인 발언이다.

결과적으로 형제애가 회복되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신원을 공개하며 용서의 발언을 한다.

“내가 사실은 요셉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굶어죽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이곳에 미리 보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3-8 참조).

거듭 말하지만, 요셉은 용서라는 말을 늦게 했을 따름이지, 이미 그의 마음은 용서한 상태였다. 이 속내를 드러내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요셉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성령으로부터 온 신령한 영감이었다.

■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

젊은 나이에 오달지게 삶의 굴곡을 겪은 요셉! 그는 ‘혹시나’ 하고 요셉의 뒤끝을 두려워하고 있는 형들에게 의미심장한 고백을 전한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19-20).

이는 창세기 전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우리 삶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 억울한 일, 잘 안 풀리는 일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느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요지부동 믿음이 되어야 한다. 삶의 고비마다 우격다짐으로 바쳤을 요셉의 기도가 우리에게 든든한 응원이 되어 주리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제 아버지 야곱의 하느님!

속죄합니다.

아버지의 응석받이, 그 거만함에 저는 기고만장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꿈속 곡식 짚단 굽실대는 흥분에, 그만 입방정을 떨었습니다.

자랑 끝에, 형들 눈에 미운털 박혔습니다.

인신매매도 불사하는 증오만 샀습니다.

좋은 시절이 삽시간에 지옥으로 바뀌었습니다.

되짚어 보니 모두가 제 탓입니다.

용서하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괴롭습니다.

혈혈단신 타향살이의 설움보다 더 괴로운 건 밤마다 나타나는 가위눌림.

“요놈 사랑둥이에 꿈장이,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그 잘난 꿈 얘기나 실컷 하라지!”

형들의 조롱과 레이저 눈빛 분노에 짓눌리는 악몽으로, 밤마다 이불이 적셔집니다.

저를 구해 주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믿습니다.

저는 꿈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비전을 믿습니다.

형들의 조롱이 찬사로, 분노의 시선이 감사의 시선으로 바뀔 그 날이,

기어이 올 것을 믿습니다.

그들이 꾀한 악이 선으로 둔갑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한, 저는 어떤 곤경도 견뎌



가톨릭신문  201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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