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15) 사상 개조 안되면 끝내 죽음으로

노개영 참상 폭로 두려워 사제 살해/ 고통스런 일정으로 자살도 발생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신자 심다재 선생(노개영에서 서세).
 
노개영에서 강제노동을 당한 바 있는 오환상 수인은 1971년 제3노개영에서 백진충 신부를 알게 됐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백진충 신부는 키가 작고 몸이 수척하고 약했으며 근시안으로 안경을 썼다고 한다. 당시 60세가 넘은 백 신부는 대련 본당에서 사목을 하다 체포됐다. 로마 교황청을 위해 반소(反蘇), 반공, 반인민 특수 공작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백 신부는 처음엔 12년 노개형을 받아 형을 다 살았지만, 만기 후에도 공산당들은 백 신부의 사상이 개조 되지 않았다고 하며 노개영에서 계속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러던 중 1978년 여름 백진충 신부가 반금 교외에서 살해됐다. 당시 공산당 간부는 백 신부가 토비(土匪 : 갱단)에게 살해됐다고 발표했지만, 오환상 수인은 공산당에게 살해 됐다고 증언했다. 토비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 수인을 왜 살해 했겠는가? 오환상씨는 1978년 중국이 개방을 하고 교황청과도 외교관계를 갖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 백진충 신부가 노개영의 참상을 폭로하는 것이 두려워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진충 신부 외에도 신부 두 명이 이 사건을 전후해 살해됐다. 노개영에서 수십 년간 강제노동을 하다 겨우 석방된 신부들이 여럿 있긴 했지만, 신부들은 석방되어서도 여전히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와서 사목을 해야 했다.

고통스런 일정이 반복되는 노개영 안에서는 자살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무순감옥에서는 300여 명의 수인들을 능원 노개영으로 파견한 적이 있었다. 강제로 보내진 수인들 대부분은 청년 학생 출신이며 1958년 대약진운동 때 반혁명 죄로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능원 노개영에는 소위 8대 기업이 있었다. 이 기업들은 기차를 제작하고, 전기 제품을 만들고, 기계를 제작하고, 강철을 제련(製鍊)하였다. 여자 노개 수인들은 수인들의 복장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이 능원 노개영에는 많을 때는 수인 11만 명까지도 동원해 일을 시켰다. 이 노개영에서도 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게다가 수인들을 돌보기 위해 인근에 머무르며 반 노개생활을 하는 수인들 가족도 2000여 명이나 됐다. 결국 1960년 겨울 능원 노개영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었다.

무순감옥에서 파견된 수인들 중 삼강구 제3노개영에 배치된 이들도 100여 명이었다. 제3노개영에서는 이미 700여 명의 수인들이 2천 무(畝)가 넘는 논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수인들은 마구간을 숙소로 개조한 곳에서 말의 분뇨를 대충 치운 자리에서 우마처럼 생활해야 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이면 철그렁 철그렁하는 소리를 내며 숙소로 돌아오는 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모발은 마른 풀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몸은 매우 수척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발목에 쇠사슬을 걸고 다니는 수인이 80여 명되는데 이 사람들은 도주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이 삼강구 노개영에서도 연달아 수인들의 자살이 이어졌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3-03-1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3. 28

예레 31장 10절
나는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그들을 위로하며 근심 대신 즐거움을 주리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