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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24) 감옥살이와 강제노동 반복해도 신앙은 고수

심한 강제노동·폭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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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모령 노개영에서 노동한 심백순 신부.
상해교구 심백순 신부도 애국교회에 들어가지 않고 교황청과의 단절을 거부해 1955년 9월 8일 체포, 감옥살이를 하다가 10년 노개형을 받고 안휘성 백모령 노개영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당시의 상황을 심백순 신부는 서신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 사상노동개조 영중(營中) 생활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오늘도 매우 배가 고프고 허기가 졌는데 따뜻한 한 끼 식사도 못했습니다. 옥수수와 기장을 섞어 만든 빵 뿐이며 그 외에 다른 찬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점심에는 약간의 채소를 먹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후 지금까지도 생활환경에 적응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강인한 동물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습관 되면 적응을 잘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일생의 세월은 대단히 짧습니다. 우리의 짧은 고생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해 매진하겠습니다.

저에게 그림을 보내 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저는 미술과 문학·음악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 노개영에서 사상개조 노동을 25년간 받아도 저의 이런 취미는 바꾸어 놓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심백순 신부는 20년 이상 노개영에서 강제노동을 당하다가 1978년 석방됐다. 하지만 당시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체포돼 노개영에서 심한 노동을 하며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선종했다.

1955년에는 상해교구 교구장 공품매 주교를 비롯해 신부들과 수녀들 그리고 신자들이 체포됐다. 전탁초씨는 상해교구 홍구 성심당에서 열심히 활동한 신자였다. 1955년 체포됐다가 이듬해 ‘교육석방’이란 명목으로 석방됐는데 다시 1960년 체포돼 백모령 국영농장 노개영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체포당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아 수시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이 노개영에 찾아갔을 때 전탁초씨의 옷에는 피자국이 있었고 구타당한 일도 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노천(露天)숙소에서 살며 강제노동을 했다고 한다. 전탁초씨는 끝내 사상이 개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개영에 남아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끌려간 상해교구 신부 중에는 엄온양 신부도 있었는데, 노개영의 간부는 노동을 잘 하지 못하는 엄 신부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동료 수인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었다고 한다. 엄온양 신부는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주위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엄 신부는 노개영에서 “나에게는 현세의 생활이 끝났다. 영생 생활이 시작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심낙천 신부는 1958년 반혁명 죄로 체포돼 수없이 구타를 당했는데, 공안국에서는 7일 동안이나 그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입으로 피를 토하며 병원에 실려 갔다. 이후 심 신부는 절강성 금화국영농장 노개영으로 끌려가, 폐결핵을 앓고 위병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12시간씩 심한 노동을 해야 했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가톨릭신문  201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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