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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열전] <39> 김시우·이시임

장애의 몸으로 형벌 견디고, 네살 아들 죽음에도 신앙 지키다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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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김시우


▲ 복자 이시임
 
 
경제 용어 중 ‘풍선효과’라는 게 있다. 풍선의 한 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불거져 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이와는 맥락이 좀 다르지만 박해 또한 풍선효과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왔다. 서울과 수도권, 충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 신자들은 대거 영ㆍ호남으로 피신한다. 이에 따라 복음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지역별로 풍선이 불거져 나오듯 했다.

그 대표적 계기는 1801년 신유박해였다. 한국교회 최대의 박해 중 하나였던 신유박해로 신자들은 대거 이주해야 했다. 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가 53위(42.7)로 가장 많은데, 이렇게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박해를 피해 전국 벽ㆍ오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신자들도 그만큼 많았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그렇지만 10여 년 세월이 흘러 다시 박해가 닥친다. 1815년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일대를 휩쓴 을해박해다. 124위 순교 복자 중 을해박해 순교자는 모두 12위(9.68)로, 신유ㆍ병인(20위, 16.13)ㆍ기해(18위, 14.52) 박해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이 중 충청도 청양 출신 김시우(알렉시오, 1782∼1815) 복자와 충청도 덕산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상몽길 일대) 출신 이시임(안나, 1782∼1816) 복자는 내포 교우촌에서 진보현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길 일대) 교우촌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 경상감영과 관덕정에서 순교한 경우다.

김시우 복자는 다른 순교자들과 달리 ‘반신불수’였다. 오른쪽 몸이 마비돼 자신의 몸을 온전히 쓸 수 없었기에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당연히 가난했다. 성품이 착하고 어진 데다 양반 출신이라서 학식도 갖췄지만 신체장애를 안고 있어 혼인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고향인 청양 인근에 일찍이 천주교가 전해지자 그는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자로서 본분을 지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애를 썼다. 가난했으므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교우들 애긍에 의지해 살아야 했고, 때때로 성한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약간의 돈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진보현 머루산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던 중 1815년 초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자 그는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자원해 포졸들의 뒤를 따라갔다. 안동을 거쳐 대구로 끌려간 그가 천주교 진리를 열렬히 증거하자 감사는 그의 턱을 부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옥에 갇힌 그는 음식을 먹을 수도, 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두 손을 다 쓸 수 없어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에 갇힌 지 불과 두 달 만인 그해 5∼6월께 그는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상처 탓에 옥사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무관 집안 출신인 이시임 복녀는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지만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재색을 겸비한 데다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던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했는데, 이로 인해 가족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한다. 이를 보다 못한 이시임은 가족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동정녀 공동체로 가던 중 뱃사공에게 끌려가 강제로 혼인한 뒤 종악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몇 해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되자 그는 진보현 머루산 교우촌으로 이주해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며 살았다.

바로 이 교우촌에서 체포된 그는 안동을 거쳐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돼 형벌을 받으며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때 자신의 품에서 네 살 아들이 죽는 고통을 겪지만, 그는 신앙을 잃지 않았고 이듬해인 1816년 12월 19일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며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박해자들에게까지 선교한 김시우 복자,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전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신앙을 증거하고 죽어간 이시임 복녀의 증거와 순교는 오늘 영남 교회의 씨앗이자 뿌리가 됐다. 그래서 김시우ㆍ이시임 두 복자의 삶은 이제 영남 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모든 하느님 백성에게 빛나는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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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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