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옥에 함께 갇힌 최여겸·한정흠 복자, 각자의 고향 장터로 보내져 참수형
그런데 이에 100년 가까이 앞선 1801년에 이미 개갑장터는 서학, 곧 천주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는다. 최여겸(마티아, 1763∼1801) 복자가 무장현을 주 무대로 선교하다가 1801년 8월 27일 개갑장터에서 순교해서다. 이러고 보면 100년 세월을 건너뛰어 서학과 동학이 적잖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개갑장터는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개갑순교성지’로, 구수내 마을은 농민군이 무장 포고문을 선포한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로 조성됐다.
최여겸이 순교하기에 하루 앞선 8월 26일엔 한정흠(스타니슬라오, 1756∼1801) 복자가 김제 장터에서 순교했다. 우리나라의 첫 저수지 벽골제로 유명한 김제에서는 그러나 복자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들 두 복자는 그해 8월 27일 전주 숲정이에서 김천애(안드레아) 복자와 함께 전주옥에 함께 갇힌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은 그 엄혹했던 박해 시기에 같은 감옥에서 서로 신앙을 권면하던 사이였고, 8월 26일과 27일에 하루 시차를 두고 각각 자신의 고향에서 순교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부르심에 응답한 터였다. 그 열절했던 신앙을 되새기며 순례 발길을 고창과 김제로 돌렸다.
호남 서남해안 선교 발판 마련하다
개갑장터 순교지 관할 본당인 고창성당에 들렀다가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무장읍성으로 향했다. 일제가 무장현을 의병과 독립군 배후 거점으로 지목, 군소재지를 고창으로 옮기면서 쇠락을 거듭한 무장면은 이제 읍성으로나마 옛 영화를 드러낸다. 성벽 복원 공사가 한창인 무장읍성에는 최여겸이
1763년 무장현 갑촌(개갑) 태생인 그는 1787년 유항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천주교 진리를 더욱 진실하게 믿고자 윤지충(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이어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도 교리를 배워 더욱 독실하게 믿음살이를 하게 됐고, 무장과 흥덕, 고창, 영광, 함평 등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전교했다. 그랬기에 당시 조정에서도 한산과 무장, 전주를 거쳐 한양 형조에 끌려온 그를 다시 고향 무장으로 돌려보내 백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했던 것이다.
▲ 개갑순교성지를 안내하던 김점동 고창본당 연령회장이 순교자현양탑 아래에서 잠시 기도를 바치고 있다. |
김점동(아타나시오, 67) 고창본당 연령회장은 “오랜 세월 동안 반상의 차별이 남달랐던 무장면 일대 주민들은 한동안 천주교 신자라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며 “최여겸 복자는 그런 가운데서도 전교에 힘써 28명이나 선교함으로써 호남 서남해안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신 사도였다는 점에서 저희 본당은 자부심을 갖고 성지를 가꿔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지상 삶을 통해 하느님과의 접점을 찾다
늦은 시간에 발길을 김제로 돌렸다. 고창에서 김제까지는 50여㎞ 남짓한 여정. 해거름녘 시내로 들어서니 금방 옛 관아가 눈에 들어온다. 김제 동헌이다. 도심 한복판에 옛 관아와 그 살림집 내아가 나란히 들어서 있어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