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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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손자뻘 후학 이기양에게 봉변을 당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0. 이기양의 정면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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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이재기의 「눌암기략」에 실린 이기양과 안정복이 만나던 현장에 대한 기록 부분이다.



늙은이의 잠꼬대

1784년 12월 14일에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는 이기양도 같이 보라는 취지였다. 이기양은 편지를 읽고 격분했다. 이기양의 어머니 송씨가 이기양의 두 아들이 천주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칭찬한 일을 거론한 내용이 그 편지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과 이방억은 당시 서학에 몰입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총억은 1779년 주어사 강학회는 물론, 명례방 집회에도 참석했던 신자였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서학 공부에 열심인 것이 흐뭇해서, 며느리인 둘째 아들 이기성의 처 광주 안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서 이 일을 자랑했던 듯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너도 천주학을 열심히 믿으라고 권유하기 위해 이 말을 썼을 텐데, 그 편지는 남아있지 않다.

안씨가 친정에 들렀다가 걱정 끝에 편지 내용을 발설했고, 조부인 안정복의 귀에까지 이 말이 들어갔다. 안정복은 다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이 사실을 권철신과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쑥 말해버렸던 것이다.

안정복은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세 통에 대해 답장을 받지 못하자, 이기양에게도 잇달아 편지를 썼다. 1785년 봄에 쓴 편지에서는 “그간 권일신이 힘껏 서학을 권하였지만, 나는 귀 곁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로 들었다네. 그 뒤에 또 편지로 권면하는 말을 써 보냈더군. 서학이 너무도 진실하여 천하의 큰 근본이며, 통달한 도리가 오로지 여기에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더군.(向來省吾力勸此學, 余聞若過耳之風. 其後又貽書勸之, 語此學之眞眞實實, 至謂天下之大本, 達道專在於是)”이라고 썼다. 안정복의 사위였던 권일신이 지속적으로 장인을 찾아가서 서학을 믿을 것을 권유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 편지는 「순암집」에는 빠졌고, 초고인 「순암부부고(順菴覆稿)」 권 10에만 실려 있다. 「벽위편」에도 수록되었는데, “밤낮 아파 신음하며 죽기를 구해도 죽지를 못하니 과연 가련한 인생이라, 이는 곧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 불과할 뿐이다”는 자조적 말까지 들어있었다. 가련한 인생이란 표현 밑에는 “이에 앞서 정약전이 이 어른이 가련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先是丁若銓謂此丈可憐故云)”라는 풀이가 달렸다. 막상 이 대목은 안정복이 이기양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 나온다. 「벽위편」이 편지 두 통을 짜깁기해서 하나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벽위편」에 실린 자료는 원전 비평이 필요해 보인다.

또 3월 9일에 이기양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는 “지난번 종현(鍾峴)을 통해 받은 답장에 앙칼진 말이 많이 있더군. 내 생각에 공이 필시 내 말을 늙은이의 잠꼬대로 보는 듯하나, 어찌 깊이 허물하겠는가?(向者從鍾峴謝答, 多有觸犯之語, 想公必以老謬之語視之, 豈足深尤)”라 했다.



함정에 빠뜨리는 도둑으로 몰다니


편지가 거듭될수록 양측의 감정은 가파르게 고조되었다. 안정복이 6월 27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두 사람에게 서학에 대해 질문했건만 한 글자의 답장도 못 받았으니, 내가 그대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실감하겠다고 말했다. 또 이 늙은이를 두고 사달을 일으키려는 재앙의 괴수가 되었다는 말이 파다하다는 풍문을 언급한 뒤, 다시 이렇게 썼다. “야소(耶蘇)란 세상을 구한다는 이름인데, 세상을 구한다면서 어리석음을 지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 옳지, 어이 굳이 묻는데 대답도 않고 그 책을 숨겨 비밀로 해서,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과연 천주가 세상을 구원하려는 뜻이란 말인가?” 어조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7월 15일에는 안정복을 찾아온 손님이 항간의 흉흉한 소문을 전하며 말을 조심하시라고 하자, 낙담해서 「폐구음(閉口吟)」이란 장시를 짓기까지 했다. 워낙 길어 듬성듬성 건너가며 읽으면 이렇다. “사람은 누구나 입 하나 있어, 말하고 먹는 것을 관장한다네. 두 가지는 없을 수 없는 거지만, 득실 따라 화와 복이 따라오누나. 듣자니 참다운 도리가 있어, 서방의 나라에서 건너왔다네. 젊은 선비 앞다퉈 믿고 따르니, 살펴보매 마음속이 좀을 먹는 듯. 벗이야 토론함을 귀히 여기니, 이 마음에 어이해 속임 있으랴. 한 마디도 알 수가 없다 하면서, 함정에 빠뜨리는 도둑 만드네. 평생 한 조각 깨끗한 마음, 밝고 곧아 간교한 꾸밈 없었지. 말과 행실 솔직함에 내맡겼거늘, 도리어 남에게 탄핵받다니. 세상에 날 알아줄 사람이 없어, 홀로 앉아 길게 탄식하누나.(人皆有一口, 只管言與食. 二者不可無, 失得隨禍福. 忽聞有眞道, 來自西方國. 士競信趨, 視之心內. 朋友貴講討, 此心豈有慝. 一言不能會, 便作陷人賊. 平生一片心, 白直無巧飾. 言行任坦率, 反爲人所劾. 世無知我者, 獨坐長太息.)”

그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려 「탄시(歎時)」에서는, “서양서 온 학술이 자못 신령스러워, 한다하는 어진 이들 참된 도라 말들 하네. 고루한 나 끌어 주는 그 힘을 못 입으니, 하늘의 심판을 빌 데 없음 뉘우치네(西來一術頗靈神, 濟濟群賢說道眞. 固陋未蒙提力, 天臺審判悔無因)”라며 비꼬았고, 「삼절음(三絶吟)」에서는 “저촉되는 말 많으니 말을 응당 끊겠고, 편지조차 남 거슬러 편지마저 끊으리. 게다가 질병 안고 왕래마저 끊으니, 문밖과의 교유는 신발 소리 끊겼다네(言多觸諱言當絶, 書或人書亦絶. 且抱沈斷往還, 交遊門外音絶)”라고 자조하기까지 했다.



마음이 아파서 쓴다


계절이 바뀌어도 양측의 분노는 가파르게 고조되어만 갔다. 안정복의 「순암일기」는 앞서도 잠깐 소개했지만, 1785년 10월 10일의 일기에 마침내 폭발한 안정복과 이기양의 일전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있다.(전문 탈초와 번역은 김현영, 「순암일기 차록(箚錄)-서학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제 51호(2017. 8)를 참조할 것.) 안정복은 양지(陽智) 현감 유순(柳詢)을 통해 이기양이 곧 찾아올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기다리던 중에 이윽고 관인의 행차가 마을로 들어서고, 권마성(勸馬聲)이 진동했다. 이기양은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뜨락까지 들어왔다. 들어서는 서슬이 퍼랬다. 당시 안정복이 74세, 이기양은 42세였다. 어른을 만나러 오면서 가마를 탄 채 뜨락까지 들어오는 것은 명백한 도발적 행동이었다.

이기양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왜 우리 어머니 편지를 남에게 말하느냐고 앙칼지게 따지며 대들었다. 민망해진 안정복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이기양은 이런 법은 없다고 기세를 더 돋웠다. “제가 어르신께 전후로 모든 일에 전심을 다했는데, 매번 책망을 받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십수 번입니다. 어르신께서 조정에 계시면서 이런저런 말이 날 때도 제가 나서서 두둔했건만 어찌 제게 이렇게 하십니까?” 내간(內簡)을 밖에다 퍼뜨린 일로 안정복은 약점이 잡혀 계속 쩔쩔매야 했다. “지난번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사람들이 다 화심(禍心)이 있다고 말들 합니다. 제가 더는 못 참겠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기세가 가라앉지 않았다. 갈 때도 이기양은 마당에서 가마를 탄 채로 나갔다. 둘은 다시는 얼굴을 안 볼 사람이 되어 헤어졌다. 그가 간 후 안정복은 그날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내가 그와는 나이 차가 크게 나서, 그의 아버지도 나를 존장(尊丈)이라 부르며 내 아들과 교제했고, 수십 년간 내게 스승의 예로 대했다. 뜻하지 않게 하루아침에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하나로 나를 이렇게 대하니, 이것이 또한 천주학의 가르침인가? 천주학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니, 이는 천주학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돌아간 뒤에 마음이 아파서 쓴다.”



독서한 사람도 이렇게 합니까?


이날 이후 안정복은 거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분노했다. 손자뻘에 가까운 후학에게 당한 느닷없는 봉변이 뼈아팠다. 이기양의 이 같은 도발적 행동은 그 즉시 남인들에게 소문이 쫙 퍼졌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에도 이때 일이 적혀있다.

“이기양이 문의 현감으로 있을 때 안정복이 이기양에게 편지를 써서, 그 아우더러 잡서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면서, 한글 편지를 가지고 증거로 삼았다. 대개 그 아우 이기성은 바로 순암의 손녀사위로, 사학에 빠져있었다. 그 어머니 심씨가 순암 며느리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외도에 빠지는 것을 걱정했으니, 어진 어머니라 말할 만하다. 순암이 이 말을 듣고는 편지 속에다 언급했던 것인데, 실제로는 이상한 일이랄 것도 없었다. 이기양이 성을 내며, 다른 날 가마를 타고 안방 문밖까지 와서 내리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남에게 규방 안의 일을 말하니, 독서한 사람도 이렇게 하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도 섞지 않고서 가마를 타고 가버렸다. 이 또한 변괴이다.”

안정복의 일기 내용과는 글의 결이 사뭇 다르다. 안정복이 「순암일기」에 쓴 것이 정전(正傳)이고, 이재기의 기록은 이 소문이 입을 옮겨가는 사이에 섞이고 부풀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시 남인 내부에서 이 일을 지켜보던 평균적 시선이었다. 이기양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걸까?

[[그림2]]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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