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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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신앙체험수기] 특별상/ 보고싶은 마리아 어머니

김미경(베로니카, 수원교구 대천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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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문채현



저의 직업은 방문요양보호사입니다.

노인성 질환으로 등급을 받은 어르신을 가정에서 케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분도 이런 일로 만났지만, 그분과 함께 지내며 많은 사건을 겪고, 폐암으로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면서, 대세를 통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신, 지금은 돌아가신 홀몸노인 김채홍 마리아 어머니의 외롭고 쓸쓸한 이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9년 4월 30일.

김 어르신을 처음 만나러 댁에 방문하는 날, 타 방문센터의 사회복지사가 동행하여 저를 소개합니다.

“어르신, 우리 센터에는 이제는 일 들어온다는 선생님들이 더 이상 안 계셔서 다른 센터에서 모셔 왔어요. 이 선생님과는 제발, 잘 지내세요”. 그러고는 가셨는데, 김 어르신의 기세가 만만치가 않네요.

달마도사 큰 액자를 등지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는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시더니, 그분만의 모호한 기준에 합격이 되었는지 더 이상은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서인지 저는 그날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저의 눈에 그분은 유난히 작고 초라한 눈만 반짝이며 경계심이 많은, 그러면서 배짱으로 사시는 분 같았지만 그럼에도 안쓰러운 부분들이 저의 눈에 자꾸 보이는 거예요.

그 후 한참 동안 저를 테스트하려고 하셨는지 여러 단계로 체크하셨는데, 예를 들면 세제 통 안에 미세한 금을 그어놓고 낭비하는지 보시고, 물건들을 엉뚱한 곳에 숨겨두고 찾게 하시고, 퇴근했는데 전화로 급하시다고 호출하여 제가 달려와서 당신을 봐주는지, 핑계를 대고 오지 않는지도 보시고, 여러 상황을 만들어서 저의 심성을 보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조금 지나니 김 어르신께서 제게 묻습니다.

“넌 왜 내게 안 따지고 가만히 있었냐? 아예 내게는 관심도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던? 그냥저냥 시간만 보내고 집에 가면 되는 거냐? 내가 성질이 괴팍스러워서 짜증 나지? 너도 성질나지? ”

조금은 어이없고 황당하였지만, 그때 그분의 눈에서 한없는 외로움, 그러니까 애정결핍 같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 같이 제발 나를 봐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왜 그리 보였는지, 저는 또 그때 왜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어르신, 저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래서 제가 다시 안 올까 봐 겁나시는 거죠? 저 여기 제가 온 거 아녜요. 어르신의 외로움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 같아요. 전 오래오래 있을 거예요.”

한참을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 그건 맞는 것 같다. 돈만 번다고 치면 나 같은 노인네 옆에 아무도 붙어 있지 않지. 지금도 떠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전화도 없어. 난 그렇게 인기 없는 노인네야. 너는 내가 한번 믿어보자.”

그 후로 김 어르신과 저는 부쩍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다시는 저를 시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십자성호 긋는 것에 관심을 보이시고 묵주 팔찌도 만져보시고, 서서히 우리 둘의 대화에 천주교 성당에 관계된 것이 자주 언급되고 김 어르신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은 김 어르신의 속 깊은 과거사도 들려주셨는데, 1927년생의 94세. 한 여자의 한 많은 이야기 속에는 일본강점기, 6ㆍ25 전쟁, 새마을 운동, 88올림픽 등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단한 막노동일과 억울한 일들, 한때는 사랑했던 이와의 이별로 상처받아 삶을 포기하면서 폐결핵을 앓던 일까지 이야기해주셨고, 오늘날에 형제들과는 금전문제로 자주 다투다가 지금은 의절하여 일절 왕래도 소식도 없다는 서글픈 일들도 알려주셨죠.

가장 가슴 아픈 건 당신이 자식을 못 낳는 여자로 살면서 설움 받은 일이었다고 하실 때였죠.

제일 좋아하는 취미는 집안에서 화초 키우는 것뿐이라고 하시는데, 저도 꽃을 좋아해서 많은 부분이 소통이 잘 되고 조화로 꽃꽂이하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왕래하는 이는 울산에 사는 양아들 내외가 있는데, 먼 곳에 계시고 바쁘셔서 일 년에 두어 번 방문하시고, 어버이날과 생신 때 배달되어 오는 꽃바구니가 유일한 자랑거리라고 하시네요. 그러고 보니 집안 곳곳에 달려있는 꽃 리본 속의 이름은 양아드님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혼자 버티려면 뭐든 아껴야 하고 사람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서 그간에는 누구도 믿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다행히 네가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라 해서 내가 더 시험해 봤다고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주십니다.

그때 저는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천주교 신자라 하면서 성호 긋고 살아가는데, 실수 안 하고 좋은 인상을 남기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이 어르신을 꼭 성당에 모시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김 어르신은 담배를 피우셨는데 기침과 가래가 나오는 빈도가 많고 쉰 목소리가 이상하여 안성의 성모병원에 모시고 가니 담당 의사가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합니다. 김 어르신은 과거에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어서 그렇지 큰 병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셨습니다.

그래도 확인해야 한다고 몇 번을 설득하여 남편 바오로의 도움으로 천안 단국대학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니 역시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폐암 소견이 있으니 조직검사를 해보고 치료방법에 대해 상의해 보자는데 김 어르신의 고집을 피워 한사코 집으로 돌아오시는 겁니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고민하시더니 제게 말씀하십니다.

“난 아파도 울산 아들에게 갈 수 없고, 신세도 질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직접 이제부터라도 임종 준비를 해야 하는데 베로니카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제야 저는 제가 이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걸 믿게 되었습니다. 이 외로운 김 어르신의 마지막에 저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려고 준비하셨음을 느꼈습니다.

김 어르신께서 천주교 공원묘지에 가보고 싶어 하셔서 남편 바오로와 함께 방문하여 상담해 보니, 설상 천주교 세례를 받아서 신자가 되셔도 법적 보호자가 없으면 모실 수 없다고 하니 너무나 실망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법적 보호자는 아니어도 보증인이 되겠다 해도 절차상 불가라 절대 안 된다 하여 저도 실망이 컸지요.

남편 차를 타고 이동 중일 때 차창 밖을 응시하는 김 어르신의 눈에는 참으로 많은 감정이 충돌하시는지, 눈물도 훔치시고 착잡한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셔서 저의 마음도 참 많이 아팠습니다.

용인 평온의 숲에 방문하셔서 화장에 대해 물어보시고 묘지도 둘러보실 때는 그 작고 굽은 어깨의 서글픈 흐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94세의 노인이 스스로 자신의 화장과 묘지를 알아보러 다니셔야 하는 이 현실이, 그간 어르신의 사람에 대한 경계와 의심, 사는 동안 자린고비가 되어 절약해야 하는 돈에 대한 애착심, 때로는 심술 같은 억지도 다 이해가 되고 너무나 가여워서 꼭 안아드렸습니다.

“베로니카야. 넌 꼭 내 곁에서 있어줘. 이렇게 오래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내게 있어서 늙어 오래 산다는 것은 벌 받는 거나 다름없다. 하루하루가 괴롭고 힘들어. 이렇게 살면서 밤에는 잠들기가 무섭고 아침에는 눈 뜨기가 처량해.”

“어르신 무서워하지 마세요. 어르신이 오래 사셨기에 저도 만났잖아요, 앞으로는 제가 곁에서 더 많이 도와 드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저와 성당에 나가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도 듬뿍 받아보셔요. 하루하루가 재밌고 할 일이 생겨서 좋아지실 거예요. 제가 모시고 가고 오고 다 할게요.”

그렇게 입교를 약속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그 약속은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어르신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분이 무섭지 않은 밤을 보내시기를, 하루하루 주님의 사랑 속에 기쁘게 눈을 뜨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날 이후에 전 그분의 양딸이 되는 신분 상승(?)을 해서 어머니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손잡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씩 도는 과시용 산책도 했어요.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딸이라고 소개를 하며 자랑을 기분 좋게 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에 가서 수속밟아 드리고 진료받고 예약을 할 때 가장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남들이 딸이 함께 와서 도와드리니 좋겠다 하시는 칭찬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안성은 오일장이 열리는데 쇼핑 겸 시장을 둘러보시며 군것질하시는 것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저를 앞장세워 다니시면서 든든해 하셨고, 행복해하셔서 저도 기분 좋게 다녔던 거 같아요.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식사량이 적어지면서 체중이 감소하고 기침도 잦아지고 점점 기력이 떨어지는 데다가 기립성 저혈압도 있으셔서, 밤에 혼자 계실 때 화장실 다녀오시거나 방안을 거닐다가 넘어져 있으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성격이 본인 스스로 뭐든 하셔야 직성이 풀리시고 급하신 성격이신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신체능력은 자주 이렇게 김 어머니를 넘어지게 했습니다.

그날도 아침에 현관문을 여니 김 어머니께서 넘어져 계셔서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을 찾는데 김 어머니의 체온이 높다고, 안성과 인근 평택, 천안, 수원에 있는 병원마다 코로나19를 의심하여 받아주질 않는 거예요. 119구급차 안에서 1시간여를 기다리다가 안산 고대병원으로 이송되었지요. 여러 진료와 진찰을 받으시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고 많은 생각이 일었습니다.

저도 아무런 준비 없이 안산으로 구급차를 타고 올 때에는 집에 있는 가족들 생각과 다시 안성으로 돌아갈 길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고, 대기실 주변에는 혼자 있는 이가 없고 모두 두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김 어머니도 늘 이렇게 막막하고 외로우셨을까,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그분께 돈이란 건 그냥 돈이 아닌 건 확실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일찍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성당에서 세례받고 레지오 활동하면서 친구도 사귀고 반 모임을 하면서 집으로 방문하는 자매들도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 텐데요. 참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김 어머니는 폐암이셔서 보호자와 면담을 해야만 퇴원시켜드린다고 꼭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밤에 울산에서 안산까지 양아드님이 오신 뒤에야 김 어머니를 모시고 댁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폐암인데, 좀 더 적극적인 치료와 수술이 94세의 고령환자에게 의미가 있을지, 또 수술한다면 안전한가, 고통을 최대한 줄이면서 생명연장을 할 건지, 양아드님과 저의 깊은 고민이 계속되었고, 김 어머니의 저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법적 보호자가 필요한 일들이 생길 텐데 김 어머니는 그 누구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으셨고, 또한 집으로 찾아오는 이도, 전화를 거는 사람도 한사람이 없는 홀몸노인의 상황이었습니다.

댁으로 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재차 또 넘어지셨고 119 응급차로 이동했는데, 다행히도 이번에는 안성성모병원에서 받아주어 중환자실에 입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갈비뼈 골절로 뼈가 폐를 찌르고 있어서 진통제를 쓰다 보니, 일시적으로 섬망 증상이 심하게 와서 모든 치료를 거부하시고, 집에 가시겠다면서 떼를 쓰고 탈출을 시도해서 모든 의료진을 무척 힘들게 했어요. 거친 욕과 주삿바늘을 잡아떼어 상처를 입고 양손은 묶어 놓아 멍들기 일쑤였습니다.

코로나19로 면회는 안 되지만 제가 다녀간 흔적을 메모로 남겨드리고 통화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병세도 호전되어 일반 입원실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보호자 자격으로 면회가 되었는데, 저에게 집에서 통장과 폐물을 가지고 오라 하시더니 환자복 속에 헝겊 전대를 차고 그 안에 통장과 도장, 폐물을 넣어 가슴에 꽁꽁 동여매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도 없이 꼭 품에 안고 계셨습니다. 주사를 맞거나 링거를 맞으실 때는 초비상경계태세로 전대를 지키셨고요. 의사, 간호사, 간병인들이 보관했다가 드린다 해도 소용이 없고 온전히 당신만이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환자복 사이로 전대가 보이면 감추어 주고 하니까 무척 흐뭇해 하시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 달을 넘게 면회를 가니까 김 어머니도 마음이 놓이셨는지 저에게 전대와 폐물을 맡기셨습니다. “베로니카야, 나의 생명줄을 너에게 맡긴다.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데, 잘 가지고 있어라.”

“어머니, 사람이 죽고 사는 거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세요. 어머니의 생명줄도 하느님께서 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 이제부터 저랑 통신교리 시작해 볼까요?”

“아냐, 믿으려면 제대로 확실하게 믿어야지. 난 어설프게 안 믿는다. 꼭 성당에 가서 교리 받고 세례받을 거야.”

“네. 어머니. 얼른 나아서 저랑 성당 가요.”

수시로 묵주기도 바쳐드리고, 보호자의 자리를 채워드리니 김 어머니는 많은 감동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갈비뼈가 자리를 잡고 붙은 것 같으니, 집으로 가서 치료해도 된다고 하여 퇴원은 결정하였으나 밤새 혼자 있는 동안이 문제였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을 어떻게 지내게 할 것인지가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울산 양아드님 내외분이 모시고 간다니 김 어머니가 펄쩍 뛰시고 절대 신세도 안 지고 따라갈 수도 없다고 고집을 부리니 아드님이 제안을 합니다. 입주 간병인을 모시겠다고 하니까, 나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베로니카만 오면 되고, 밤에는 혼자 있어 보겠노라고 버티시니까, 아드님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에게 제안이 왔는데, 당시 저는 시어머니 모시고 남편과 출근하는 아들, 고3 아들을 둔 제일 바쁜 며느리이고 아내이고 엄마인데, 입주 간병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가족도 없이 외로운 노인이라니 가서 도와주라 하시고, 고3 아들은 제 실력은 벌써 고1ㆍ2 때 결정이 났다면서 더 열심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도 큰아들 녀석도 협조해 주는 일이 일어나더라고요. 그야말로 기적인 거죠. 우리 집에서 제가 없이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해나간다니 말입니다. 그 역시 하느님의 계획 속에 우리 가족들도 좋은 협조자였음을 믿습니다.
 

그렇게 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놀랍게 김 어머니께서 달마도사의 얼굴을 큰 수건으로 덮으라 하시는 거예요. 이제는 하느님을 믿기로 했으니 달마도사 액자를 치울 건데, 울산 아들이 준 선물이니 나중에 울산에 다시 보낸다고 약속을 해주십니다. 머리맡에는 묵주를 두어 수시로 만져보시고, 저의 묵주기도 소리가 좋다면서 들으시면서 잠을 청하시기도 했습니다. 김 어머니께서는 그때까지도 꼭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으신다고 말씀을 하시곤 하셨죠.

집안에서 답답해 하시면 남편 바오로 차로 미리내성지에 모시고 갔는데, 어린애처럼 좋아하셨습니다.
 

“나 죽으면 여기 미리내성지에 묻어 주면 좋겠네.” 그 말 속에 법적 보호자가 없어서 천주교공원묘지에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그 속상한 마음이 느껴지고, 긴 여운이 남으면서 듣는 저의 마음마저 먹먹해지고 슬펐습니다.
 

그러던 며칠 후에 사고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잘 지내시다가 곤히 잠든 저를 깨우지 않고 혼자서 새벽에 조금씩 이동하고 앉아계시다가 옆으로 넘어지셨는데, 이번에는 고관절 골절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왜? 저를 깨우지 않으셨냐고, 안타까운 마음에 큰소리로 다그쳐 물으니, 내 딸이 피곤해서 곤히 자는데 엄마가 깨울 수가 있느냐면서 괜찮다고 저를 위로해 주시는 거예요.
 

“아~ 제가 그분에겐 진짜 딸이었구나. 난 딸의 흉내만 내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마음 깊은 곳에서 뉘우침과 함께 이렇게 사랑을 주고 있는 분께,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김 어머니가 혼자 돌아가시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하였습니다. 주님은 김 어머니를 통해 저의 위선을 깨주시고 진실된 마음으로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하게 저를 변화시켜주셨고, 저는 이분이 어서 빨리 주님의 자녀가 되시길 기도했습니다.
 

김 어머니는 폐암 치료와 정형외과의 협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관절도 위험하지만 김 어머니의 더 큰 위험은 폐에 종양과 물이 차서 염증과 열과 호흡 이상, 가래였습니다. 염증으로 인해 열도 수시로 올라가 냉찜질을 해서 열을 떨어뜨려야 했습니다. 자가호흡이 되지 않아 마우스 호흡기를 차고 산소호흡을 하는데, 가래가 차면 제거해줘야 했고 호흡기치료도 병행해야 했습니다.
 

김 어머니가 답답해 하시면서 마우스 호흡기를 자꾸 벗으셔서 양팔을 묶어 두게 되었는데, 묶어두면 고래고래 소리치시고 제가 안 보이면 도망간 줄로 아시고 소리쳐 찾으시고요. 그야말로 혼돈의 병상 생활의 연속이었고 병실에서의 생활은 저에게도 어렵고 무서운 시간이었어요.
 

수시로 오는 간호사들로 인해 잠은 늘 부족했고 새벽에 우두커니 서서 링거 체크하는 모습이 섬뜩할 때도 있고요. 김 어머니의 앓는 신음과 가래 끓는 소리는 계속되고 산소포화도와 혈압이 떨어지면 경보음이 울리는데, 전 그때마다 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줄 알고 놀라고요. 아직은 안 되는데, 영세도 못 받으셨는데…. 내일은 꼭 어머니께 대세를 드려야겠다고 다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밝은 날 김 어머니께 설명을 잘 해드렸습니다. 가까운 날에 성당 가기는 힘들 것 같고 병실에서 대세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번에는 순순히 그리하겠다고 하십니다. 대세 양식대로 천주교 교리와 하느님의 자녀 되시기를 원하는지, 회개하면서 구원받음을 믿는지 확인하고 저와 남편 바오로가 증인이 되고 울산 아드님의 허락으로 대세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세례명은 어머니께서 성녀 중에 자식을 낳은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모 마리아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김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좋아하셨고, 그렇게 마리아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저는 마리아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니 얼른 성당 사무실에 가서 대세신고부터 했습니다.
 

지난날의 죄를 용서받으시고 아기처럼 순수하고 얌전한 어머니가 되셔서 침상에 누워만 계시니 욕창이 날까 봐 자세변환에 신경 쓰고, 호흡의 이상이 있는지, 열 체크에 온 신경이 쓰였습니다. 마리아 어머니가 주무실 때는 앞으로 있을 일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하고 있는데 전 이런 상황이 적응이 안 되어 불안하고 그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전 모든 일을 할 터이지만 저 또한 혼자 두지 마시고 저의 두려움을 걷어주시고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청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 일러스트=문채현


 

2020년 7월 16일.
 

폐에 물이 많이 차고 염증 수치가 높아서 열이 수시로 올라가니까 물 일부를 빼내기로 했고, 어머니의 이동이 여의치 않아서 병실에서 시술하기로 했던 날입니다. 담당 의사의 집도로 앉은 자세에서 물을 빼냈고 무사히 잘되었다고 울산 아드님과 통화하고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산소포화도가 5~10으로 떨어지면서 혈압이 마구 떨어지는 비상상황이 되면서, 순식간에 입원실이 난리가 났습니다. 분주히 간호사들이 뛰어다니고 집중적으로 산소를 투여해서 산소포화도를 올리는 듯싶었는데, 다시 떨어진 산소와 혈압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뚜~. 정말 믿기지 않을 허망한 이별이었습니다.
 

저는 멘붕이 오는 것 같이 멍하니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지만, 도저히 보고도 믿지 못할 사망이었습니다. 말씀 한마디, 눈빛 한 번 맞추지도 못하고 그렇게 조용하게 영원히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마리아 어머니께서 대세를 받으시고 저에게 아무런 고통 없이 자는 듯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고 하신 말씀처럼 그렇게 주무시듯이 떠나셨습니다.
 

울산 아드님이 안성으로 오시는 동안 간호사 한 분이 환자복을 환의 해주신다고 옷 갈아 입히는 걸 도와달라고 하셔서 제가 마리아 어머니의 상체를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듯이 머리를 떨구시는 거예요.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듯이. 그렇게 마리아 어머니를 품에 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진작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많은 걸 못 해 드린 것이 너무나 미안해졌습니다. 94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이별하시면서 곁에 사람 하나 없이 늘그막에 만난 저의 품에서 잠드시다니, 정말 가슴이 아프고 저리도록 아팠습니다.
 

장례 절차를 위해 양아드님이 어렵게 연락하신 법적 보호자인 동생 할아버지 한 분만이 오셨는데, 마리아 어머니의 부고를 친척들한테도 전했는데 여러 일로 안 온다고만 할 뿐, 오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형제나 일가친척의 연락처를 왜 가르쳐 주질 않았는지 이해가 됐고, 그렇게 상처받고 홀로 지냈을 마리아 어머니가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엔 동생 할아버지, 양아드님 내외, 저와 남편 바오로 이렇게 다섯 명만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장 측에선 조문객도 없으니, 망자는 영안실에 두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출관할 때에만 오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살면서 이렇게 초라한 장례를 본 적이 없는데, 기가 막히고 속이 너무나 상했지만, 그렇다고 나설 처지도 못되어서 기도만 할 뿐이었죠. 빈소도 꾸릴 수 없어 집으로 왔지만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어서 서둘러 성당에 가서 장례 미사를 청했습니다. 다행히도 대세 신고가 접수되어 있던 터라 일정을 잡아 주었고, 양아드님 내외도 좋다고 해서 마리아 어머니의 생애 첫 미사이면서 마지막 미사인 당신의 장례 미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막달레나 언니, 로사 언니, 히야친타 언니, 아가페 언니들과 대천동본당 연령회 회원분들이 많이들 참석해 주셔서 장례 미사는 무사히 드렸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드리지 않았다면 전 평생을 두고 후회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용인 평온의 숲 화장터에 가서는 영정사진을 동생 할아버지가 들고 양아드님이 오른쪽에서, 남편 바오로가 왼쪽에서, 영구차 운전기사분이 도와주셔서 이동할 수가 있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때에도 크게 소리 내 울지 않는 서글픈 이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서 아프지 않고 외롭지도 않고 주님의 사랑만을 받고 사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셨습니다.
 

마리아 어머니와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저는 그분의 양딸로서 미사를 넣고 가끔은 그분을 만나러 갑니다. 마리아 어머니의 인생은 고되면서 힘들고 이별은 초라했지만, 분명한 건 마리아 어머니는 밀알이 되어서 또 다른 이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 가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와 마리아 어머니의 일들을 지켜봐 오시던 장애 등급의 남자 어르신이 계셨는데요. 제가 케어하던 분이신데, 마리아 어머니의 사정으로 인해 잠시 일을 중단했던 대상자분이셨어요. 제가 마리아 어머니를 하느님 아버지께 무사히 보내드리고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께서 마음으로 천주교 신자인 저를 좋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천동성당에 예비자 등록을 하시고 열심히 출석하고 계십니다. 물론 휠체어 기사는 남편 바오로씨, 안내는 저 베로니카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은 상상불가인 것 같아요. 누군가는 예사롭지 않게 지켜보고 있으면서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가까운 곳의 이웃들과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마리아 어머니께 보내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 어머니께서 주님 계신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기를 기도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김미경 (베로니카, 수원교구 대천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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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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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덮어 주는 이는 사랑을 키우고 그 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구를 멀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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