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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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를 사목 거점으로 박해받는 교우 찾아가 사랑 전하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2>배티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 - 조선에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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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론을 띄워 찍은 배티성지 전경. 왼쪽에 최양업 신부 기념관(대성당)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최양업 신부 순교ㆍ박해박물관이 보인다.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면, 최양업 신부 사제관 겸 신학교, 복지 오반지 바오로의 묘소가 나온다.



최양업(토마스)과 김대건(안드레아). 같은 조선인 신학생으로, 같은 조선인 부제로, 둘은 같은 길을 걸었다.

사제 수품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육로를 통해, 해로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갈 입국로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함께’ 꿈꾸고,‘ 함께’ 포교할 날을 기다렸다. 둘은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 따라 걸어

그렇지만 두 사제는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사목을 함께할 수 없었다.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는데 죽음은 둘을 갈라놓았다. 세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부제였던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자샹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첫 번째 사제가 됐지만, 사제가 된 지 1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1846년 12월이 돼서야 의주 근처 변문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함께 병오박해 소식을 접한 최양업 부제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야 했다”고 적는다.(1847년 4월 20일 자 네 번째 서한) 형제 사제를 잃고 홀로 떠나야 하는 사목의 길, 최 신부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는 미뤄 가늠해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최양업이 홀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건 1849년 4월 15일 상하이 장자러우 성당(혹은 사쟈후이 예수회신학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서도 7개월이 지나서였다. 만주대목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와 함께 랴오닝성 좡허시 차쿠성당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한다. 조선을 떠난 지 13년 만이었고, 무려 6차례에 걸친 입국로 탐색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어찌 감회가 깊지 않았을까? 순교한 부모, 성 최경환과 복자 이성례의 묘소도 찾고 싶었고, 형제들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걸 다 제쳐놓고 최 신부는 1850년 1월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열병을 앓던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당시 충청도에 머무르던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 역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 만남 또한 하루를 넘지 못했다.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최 신부는 전라도를 시작으로 경기ㆍ충청 일부 지역과 경상, 강원도 등 5개도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해마다 7000리 안팎 부르심의 외길을 걷고 또 걸어 교우촌을 찾았다. 그의 발길 앞에는 끊임없는 고통과 고뇌의 강물이 흘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힘을 냈다. 그 발걸음에는 언제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그의 순교와 선교 영성은 돈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구 장상과 스승 신부들, 교우들, 조국과 동포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 코로나19에도 배티성지 대성당에선 어김없이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기원하는 미사가 날마다 봉헌된다. 말씀의 식탁 앞에는 최양업 신부의 대형 성화가 놓여져 있다.



배티를 사목 거점으로

그러나 그 사랑은 추상적인 게 아니었다.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도 최 신부는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 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1854년 11월 4일 자 10번째 서한) 희망하고 기도했다. 현세에서도 함께해줄 인격적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그 가르침 안에서 살고자 노력했고, 그분의 넘치는 자비와 섭리에 희망을 두고 위로를 받았다.

이처럼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최 신부의 사목 거점은 진천 배티였다. ‘배나무 고개’(梨峙) 배티를 사목 거점으로 선택한 건 어찌 보면 섭리였다. 1837년 모방 신부의 사목 방문과 함께 배티공소가 설정됐고, 그 배티를 중심으로 인근에 삼박골과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동골, 발래기, 새울, 지장골 등 15개의 교우촌이 산재했기에 박해의 손길을 피하기에도 수월했고, 사목 거점으로 삼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 있기가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일상을 추구했던 최 신부에게 배티 같은 곳이 또 없었다.

그 배티엔 이제 최양업 신부 기념관(대성당)과 최양업 신부 순교ㆍ박해박물관, 1996년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을 맞아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봉헌된 배티의 첫 성당인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 등이 세워져 있고, 최초의 조선대목구 소신학교(성당 겸 사제관) 또한 복원돼 있다. 또 산상 십자가의 길 14처와 야외 산상 제대, 양업영성관(피정의 집), 무명순교자 6인묘, 무명순교자 14인묘, 배티 쉼터 겸 청소년수련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복자 오반지(바오로)의 묘도 이장돼 순교성지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 아울러 배티에서 백곡성당 쪽으로 2.5㎞가량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한국전쟁 중 피랍된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쓴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주 무대가 된 삼박골 교우촌의 모녀 순교자 묘도 빼놓을 수 없다.


▲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이콘.



착한 목자의 표상

배티를 사목 거점으로 삼아 교우촌을 순방하는 최 신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착한 목자의 표상’이다. 눈앞에 불어 닥친 박해 때문에 교우들이 모든 것을 잃고 이리저리 쫓기거나 체포되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최 신부는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극한 사랑을 다 했다. 1850년 10월 1일 자 7번째 서한에 나오는 ‘안나’의 사례는 하느님께서 최 신부를 통해 박해받는 조선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잘 드러낸다. 양반 집안 출신으로 동정녀로 살고자 했던 안나를 찾아가 고해를 주고 영성체를 해주는 최 신부의 모습은 착한 목자란 무엇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배티성지 담임 이성재 신부는 “코로나19는 진짜로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살지 않으면 위안을 줄 수도, 의미를 줄 수도 없다는 것, 또 넓이의 사목보다는 깊이의 사목을 해야 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최양업 신부님은 우리 교회가 영성의 교회, 사랑의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전해준다”고 강조한다. 이어 “특히 최 신부님의 서간을 읽어가다 보면, 영성체를 줄 가능성이 채 0.01도 안 되는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와 인도를 따라 안나를 찾아 나서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면서 “인간적 계획이나 노력, 방법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만 의지하며 교우들을 찾아가는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 시사하는 게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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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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