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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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신부의 신학생 선발 소문이 돌자마자 “후보자 여기 있습니다”

[신 김대건·최양업 전] (4)신학생 후보 추천한 조력자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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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중ㆍ하순 조선에 입국해 한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6일 최양업을 시작으로 3월 14일 최방제, 7월 11일 김대건을 데려와 함께 기거하면서 신학생 후보로 양성했다. 모방 신부가 이렇게 신속하게 조선 신학생 후보들을 선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추천한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회에 걸쳐 모방 신부가 신학생 후보를 선발하는 데 힘을 보탠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본다.



모방 신부 조선 입국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첫 번째로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편지에서 “1월 12일 자정쯤 조선인 5명을 따라서 변문을 떠나 조선에 입국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 한양에 안착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한국천주교회사 2」는 “1836년 1월 12일 자정에 중국 측 국경 지대인 이른바 ‘변문’을 출발한 그는 사흘 뒤인 1월 15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285쪽)고 한다.

같은 편지에서 모방 신부는 의주 변두리에서 6명이 함께 떠나 12~16㎞ 정도 갔다가 말 2필을 끌고 온 교우 2명을 만난 다음, 한양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유방제(여항덕) 신부가 마중 보낸 5명의 교우를 만나 두 무리로 나누어 한양에 입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13명이 말 2필로 중국 땅 변문에서 한양까지 사흘 만에 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 기마대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16일 한양 도성을 통과하기까지 7일이 걸렸다.

아마도 ‘3일’은 ‘13일’의 오기가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조선 시대 동지사 일행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일정을 통상 13일에서 보름으로 잡았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입국한 1년 뒤 조선에 들어온 샤스탕 신부도 변문에서 한양까지 15일이 걸렸다. 김대건ㆍ최양업ㆍ최방제 세 소년의 일정도 마찬가지다. 모방 신부를 입국시킨 길 안내자는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이광렬(요한), 마부 조신철(가롤로), 이손빈(섬베, 베드로)이다. 이들은 세 신학생의 유학길을 안내하고, 샤스탕 신부를 입국시켰다. 단 현석문(가롤로)이 유진길을 대신했다. 이들이 군사 작전을 펼치듯 치밀하게 행동했을 것으로 볼 때 모방 신부를 3일 만에 한양까지 입국시켰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1836년 1월 12일 압록강을 건넌 모방 신부는 1월 25~27일께 한양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모방 신부는 한양으로 오는 길에 일행에게 조선 교회 사정을 물었다. 일행은 처음엔 “자신은 모른다. 정하상에게 물어보라”고 했고, 정하상은 “유방제 신부에게 물어보라”고 했으나 차츰 조선 교회 사정을 모방 신부에게 소상히 전했다.

모방 신부는 한양에 도착한 후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생 선발에 힘썼다. 모방 신부는 같은 편지에서 “제가 후보 신학생을 모집하려 한다는 말이 퍼져서 두 소년이 저에게 보내져 왔습니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최양업이 모방 신부가 한양에 도착한 지 10일여 만에 신학생 후보로 뽑혀 한양으로 올라온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신속하게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하상과 남이관

김대건은 1836년 4월 자기 집에서 사목 방문을 온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일성록」 1839년 8월 7일 ‘김제준 공초’, 「추안급국안」 ‘사학모반죄인 양한ㆍ진길등안’ 1839년 8월 13일 ‘김제준 공초’ 참조) 하지만 최양업과 최방제는 누가 신학생 후보로 추천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류한영 신부와 차기진 박사는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에서 최양업과 최방제를 신학생 후보로 추천한 이가 “정하상과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방제 신부도 그 이전부터 이들을 신학생 감으로 눈여겨보아 오던 터였다”라고 적고 있다.(61쪽)

모방 신부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후동에 있는 정하상의 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집은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유방제 신부에게 선교 자금을 주어 마련한 집으로 선교사들의 ‘안전 가옥’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던 정하상은 이 집에서 남이관ㆍ조증이(바르바라) 부부와 함께 거주했다. 남이관은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처조카이며 정하상과는 친척이었다. 그는 정하상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앞장서던 평신도 지도자였다. 모방 신부는 이 집에서 정하상, 남이관, 이광렬, 권득인, 현석문 등 평신도 회장들과 함께 조선 교회 사목 방향을 논의했다. 정하상과 남이관이 신학생 후보 선발에 최고 관심을 보이던 모방 신부에게 신심 깊고 영특한 교회 지도자 자제를 추천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후동 곧 ‘뒷골’은 현재 서울 중구 산림동과 주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살리뭇골’로도 불렸다. 1837년 12월 31일 한양에 도착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이곳에 살았다. 따라서 후동 정하상의 집은 신학생 후보를 양성한 한국 교회 ‘첫 예비 신학교’ 자리일 뿐 아니라 ‘첫 주교관’ , ‘첫 서양 선교 사제들의 은신처 곧 사제관’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입국 이후부터 중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만 3년을 후동 정하상의 집에 살았던 유방제 신부는 1834년 11월 18일자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현재 제가 사는 곳은 그리 좋지는 않지만, 지붕이 있는 집인데 남이관과 정하상 바오로 가족들과 마치 한 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남이관은 그의 아내와, 정하상은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고, 2~3명의 여 몸종과 2~3명의 과부가 그들의 부인인척하고 살고 있습니다.…남이관은 큰 형으로서, 정하상은 동생으로서 그리고 저는 내ㆍ외적으로 대리자로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14, 15, 17, 18명이 가끔은 20명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전수홍, ‘유방제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참조)

정하상은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과 가까운 사이였다. 용인에 살던 김제준은 모방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서울 후동 정하상의 집을 왕래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정하상은 또한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김제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따라서 김제준은 자연스럽게 남이관과도 교분이 두터웠을 것이다. 1836년 주님 부활 대축일 이후 모방 신부가 지방으로 사목 방문을 떠났을 때 정하상이나 남이관이 분명 동행했을 것이다. 따라서 모방 신부가 회장으로 있던 김제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들 중 누군가가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추천했을 것이고,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됨됨이를 살펴본 후 그 자리에서 신학생 후보로 낙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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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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