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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병에 걸린 맏형 최방제, 사제의 꿈 이루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신 김대건·최양업 전] (13)동료를 잃는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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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방제가 1837년 11월 27일 마카오 극동대표부 조선신학교에서 선종했다. 조선 신학생의 맏형인 최방제의 사망 원인과 그의 무덤을 찾는 것은 한국 교회 사제 양성 역사를 정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사진은 마카오 가톨릭 신자 무덤인 성 미카엘 공동묘지로 현지 순례 안내인들이 이곳에 최방제가 묻혀 있다고 추정해 설명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1837년 11월 27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학생이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선종했다.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조선신학교 교장이며 스승인 칼르리 신부가 그의 임종을 지켜봤다. 최방제의 죽음은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둘은 맏형이면서 동기인 최방제를 늘 의지하며 생활했다. 기둥처럼 든든하던 형이 갑자기 죽었으니 김대건과 최양업의 슬픔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최방제는 아버지 최한지(야고보)와 어머니 황 안나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주 최씨 가문의 양반으로 최양업과 친척으로 알려졌다. 누나는 동정녀로 살았고, 큰형과 둘째 형 최형(최치장이라고도 불림)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그는 1836년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신학생 서약서에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양업, 김대건과 동년배로 생일이 가장 빠르거나 최소한 한 해 먼저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가톨릭평화신문 제1614호 2021년 5월 23일 자 ‘신 김대건 최양업전’ 6회 참조)

최방제는 세 명의 조선인 신학생 가운데 가장 신심이 깊고, 모범적이었고, 똑똑했다. 칼르리 신부가 기록한 최방제에 관한 평과 그의 임종 모습을 간략히 정리했다.





교장 칼르리 신부가 기록한 신학생 최방제와 그의 임종



“세 명 중에서 믿음이 더 강했고, 신심이 더 깊었고, 앞으로 이 어린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촉망되던 학생이 꽃다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심판 앞에서 깜짝 놀라고 아연실색해졌습니다.…그는 자기 본분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주위 사람들을 감탄시켜 마지않았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나의 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늘 완전한 순종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효심은 모든 불편과 속박을 초월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라틴어 공부에서 보인 진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 동안 그는 성경을 알아듣게 낭독했습니다. 이렇게 벌써 우리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게 되었을 때, 지난 달(1837년 10월)경에 위열병에 걸렸습니다. 그 발작이 처음에는 약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갑자기 그 증상이 악화됐습니다. 갑작스러운 기력의 쇠약과 극도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병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흔히 있는 것처럼 임종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서 마지막 성사를 받지 못하지나 않을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위험이 다가오자 교회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예절이 끝난 후 나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비에르는 나의 손을 잡고 ‘Gratias Patri’(감사합니다. 신부님)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십자고상에 입을 갖다 대고 ‘착한 예수! 착한 천주!’를 열심히 되풀이했습니다.

병세의 악화로 불안해진 우리는 그를 살려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조선 땅의 이 첫 결실은 하늘나라를 위해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11월 26일에서 27일 밤중에 그의 병상 곁에서 바친 밤기도와 아침기도가 끝나자 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숨결이 점점 곤란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다른 두 학생과 함께 임종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사죄경을 하고 전대사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어 우리의 성스러운 젊은이는 그의 하느님 곁으로 가기 위해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비탄에 잠긴 조선 선교지가 그의 첫 주교의 입국을 고대하고 있을 때 조선 국경에서 선종했습니다. 성직에 예정되었던 이 첫 조선인은 8개월간의 계속된 위험을 극복하고 오래지 않아 그의 조국의 사도가 되기 위해 그의 생애를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을 때 돌연 사망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전능하신 뜻의 안배를 찬미합시다. 우리 인간의 생각대로 조선 선교지를 번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았고, 당신의 전적인 개입을 위해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 홀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칼르리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뒤브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81~83쪽, 청주교구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2집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61~67쪽 참조)





최방제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이제 최방제의 죽음에 관해 하나씩 풀어보자. 먼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다. 칼르리 신부는 앞의 글에서 최방제가 ‘fievre gastrique’로 숨졌다고 했다. 이를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에는 ‘열병’으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2집」에는 ‘위열병’으로, 또 서울대교구 주보 2021년 2월 21일 자 「김대건 신부 특집-유학생활 적응하기」에는 ‘말라리아 풍토병’로 표현했다. 사전적 의미로 ‘열병’과 ‘위열병’, ‘풍토병’은 전혀 다르다. ‘위열병’은 한의학 용어이다. 한의학에선 위열병의 주요 원인이 ‘스트레스’와 ‘기름지고 매운 음식’이라고 한다. 김대건이 마카오에서 복통과 두통, 요통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듯이 최방제 역시 과도한 스트레스로 고통받았다. 스트레스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 요인인지는 좀더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충분히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심과 용기, 또 의지할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열병 또는 풍토병이 그의 죽음과 개연성이 높다.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조한건 신부는 “‘풍토병’이 최방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증명하듯 마카오에 거주하던 많은 서양인이 풍토병에 시달리고 사망했다. 마카오에 유행하던 풍토병은 ‘말라리아’이다. 최방제는 10월 중순 말라리아에 걸려 한 달여 고생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가족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까

두 번째, 최방제의 가족과 조선 선교사들이 그의 죽음을 알았느냐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는 앵베르 주교에게 “조선 학생들과 또 그중 한 명이 죽은 이야기를 알렸다”고 했다.(「전교회지」vol. 322 참조) 그러나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편지에는 최방제의 죽음에 관해 애통해 하는 내용이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에서 “세 명의 학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카오에 데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들을 페낭 신학교로 보내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최방제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앵베르 주교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선교사들과 최방제의 가족은 그의 죽음을 그때까지 알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방제의 죽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조선 교회 신자는 1839년 1월 밀사로 북경에 도착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조신철(가롤로)이다. 이들은 조선에 귀국한 후 선교사들과 최방제 가족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3월 30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는 12월에 2~3명의 신학생을 신부님께 새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로 세련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선배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선배(김대건, 최양업- 필자 주)를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셨다는 소식을 받게 되면, 올해에 다른 학생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최방제의 죽음을 알고 있음을 암시하는 글을 적었다. 하지만 그는 최방제의 죽음을 애통해 하거나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등 목자로서의 표현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묘지는 어디 있을까

세 번째, 최방제는 어디에 묻혔느냐이다. 최방제 무덤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 연구된 극동대표부 보고서나 조선 선교사,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글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카오에 가면 성지 순례 안내자들이 성 미카엘 공동묘지 무명인 묘를 가리켜 최방제가 묻힌 곳이라고 추정하며 순례자들에게 참배하게 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허황한 일이다. 성 미카엘 공동묘지는 최방제가 죽은 지 17년 뒤인 1854년에 조성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묘원이다. 또 파리외방전교회 인근 개신교도들을 위한 묘지가 있지만 최방제가 그곳에 묻혔을 가능성은 당시 시대상으로는 거의 없다.

최양업에 이어 두 번째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지만, 맏형으로 조선 신학생을 대표했던 최방제가 어떻게 사망했고, 또 어디에 묻혔는지를 밝히는 것은 한국 교회 사제 양성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언젠가, 또 누군가 이 작업을 시작해 주길 기대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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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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