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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4) 최양업, 사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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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없는 길을 걷다

“그(최양업)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861년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살피면 최양업은 그야말로 초인적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낮에는 걷고, 밤에는 성사를 집전했다. 또 해가 뜨기 전에 이동했다.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그 의미’를 연구한 박금옥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는 최양업과 최양업의 동료 사제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최양업이 1년에 7000리, 즉 약 2800㎞ 이상을 걸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최양업이 걸었던 길은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페롱 신부는 최양업이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고 말한다. 최양업 스스로도 1851년 10월 15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다”며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다”고 전했다.

최양업은 충청도,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 등 5개 도에 걸쳐 사목활동을 했고, 강원도의 일부 교우촌도 방문했다. 최양업이 국내에서 사목하기 시작할 무렵인 1851년에만 담당 교우촌이 127곳이었고, 이후로도 새로운 교우촌들이 생겨나 담당 교우촌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각 교우촌에는 보통 수십 명의 신자들이 모여 살았다. 규모가 작은 곳은 단 2~3가구가 모인 정도였다. 최양업은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이라며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도 방문하고 다녔다고 전했다.



■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최양업이 그렇게 어려운 걸음을 옮기며 만난 신자 수는 1850년에 3815명, 1851년에 5936명이다. 당시 조선 전체 신자 수의 34.7~52.1에 달한다. 또 최양업을 통해 세례를 받은 이는 1855년까지 전국 영세자 수의 46.5를 상회했다.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가 증가하면서 비율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국 영세자 수의 33는 최양업이 집전한 성사를 통해 신자가 됐다. 매스트르 신부는 최양업이 “일에 찍혀 눌려 있었다”고 표현하면서 “최 신부는 한 해의 대부분을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고 전한다.

엄청난 열정으로 가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사목활동을 펼친 최양업이지만, 그는 늘 자신의 부족함에 안타까워했다. 최양업은 1857년 작성한 편지에 거의 2년 동안 성사를 하지 못하고 선교사를 기다려오던 신자들을 방문하러 갔다가 외교인들의 방해와 위협으로 신자들을 두고 새벽의 어둠을 틈타 마을을 벗어나야만 했던 사연을 담았다. 최양업은 “저 자신의 무능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비통한 일이냐”고 한탄했다.

모든 길이 순탄하지도 않았다. 늘 박해자들의 감시와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고, 불량배 등을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최양업은 여러 차례 관아에 잡히기도 했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매를 맞다 거의 알몸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사한 일도 있었다.

최양업이 이토록 쉼 없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자들을 찾아다니는데 매진한 이유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 품에 안기길 고대했기 때문이다. 최양업은 1855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들에게는 더 큰 기쁨이 있다”며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태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 풍년이 들었다”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많은 사실을 다소 들뜬 어조로 전했다. 최양업은 자주 조선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는데, 심지어 박해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최양업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저 박해자들이 마침내 교회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양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주 하느님을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섬기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기도했다.



■ 신자들과 함께

최양업은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8만 리, 약 3만㎞를 걷고 또 걸으며 사목했다. 최양업의 활동반경을 살폈을 때 최양업의 사목활동은 신자들을 찾아 교우촌 순방으로 시작해 교우촌 순방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기계적으로 걷고 성사만 집전했던 것은 아니다. 최양업은 늘 신자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또 혼자서 하는 사목이 아닌 신자들과 함께 펼치는 사목활동을 했다.

조선에 입국한 뒤의 최양업의 서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조선의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에 관한 이야기다. 최양업은 이 이야기들을 단순한 사례 소개가 아닌, 마치 현장을 보고 있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양업이 자신이 만난 신자들의 사연과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양업의 서한을 번역한 고(故) 정진석 추기경은 “실제로 최양업 신부님의 서한 내용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충격적이며 교훈적”이라며 “그러면서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단하기 어려울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골고루 들어 있다”고 말했다.

최양업의 사목 관할지에서는 한 해에 7~8곳의 교우촌이 생겨났고, 예비신자들이 줄을 이었다. 최양업의 관할 지역에서만 세례 받을 준비가 된 예비신자가 1000명에 달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 경문과 교리 문답을 열성적으로 배워 경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최양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양업이 활동한 시대에는 사제가 비신자에게 교리를 전하기 쉽지 않았다. 박해자들의 감시가 심했을 뿐더러 외교인에 대한 사제의 신분 노출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양업의 관할 지역에서 이토록 신자들이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최양업이 교우촌의 평신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과 함께 사목했기 때문이다. 최양업은 각 교우촌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신자들을 지도했고, 그들과 함께 사목을 완성시켜나갔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멍에목성지

멍에목성지(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6)는 최양업이 방문해 성사를 집전하던 사목지로, 복자 박경화·박사의 부자가 살던 교우촌이다. 성지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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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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