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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총애 받던 황사영, 10년 뒤 천주교 핵심 인물로 부상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2. 보석처럼 빛났던 소년 황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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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9월 2일 황사영 묘소 발굴 당시의 모습. 유홍렬 교수와 방계 후손 황영하씨 모습(왼쪽 사진)과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합. 종손 황세환 선생 제공



무덤 속 백자합에서 나온 비단천

1980년 9월 2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로 불리는 홍복산 자락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묘소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무덤 좌측을 일부 개봉하자 관 좌측 하부에 오석 7개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어 놓여 있었다. 곧이어 십자가 좌측 끝에서 청화백자합 하나가 나왔다. 이 백자합은 뚜껑이 깨진 옹기 항아리 속에 들어있었다. 백자합의 뚜껑을 열자 바닥에 덩어리진 천 조각이 나왔다. 비단으로 보이는 이 천은 검게 변색되어 원래의 색채는 알 수 없었고, 남은 파편은 가로 7㎝, 세로 4.5㎝의 작은 조각이었다.

이 작은 천 조각은 무슨 의미로 청화백자합에 담겨 그의 무덤 속에 남겨졌을까? 그 의미를 알려면 그로부터 190년 전인 1790년 9월 12일로 잠시 돌아가야 한다. 이날은 증광시(增廣試)가 열려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국왕 정조는 이문원(文院)에 직접 납시어 합격자를 소견하였다. 임금은 그들 중 70세 이상 고령 합격자 5명과 20세 이하 합격자 5인을 따로 불렀다.

그들은 임금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차례 더 시험을 치렀다. 노인은 ‘노인성(老人星)’을 제목 삼아 부(賦)를 짓고, 소년들은 ‘소년행(少年行)’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임금은 이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직접 채점했다. 황사영은 이날 16세의 최연소 합격자로 이 자리에 참석했고, 임금이 손수 점수를 매긴 두 번째 답안지로 다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임금은 황사영을 앞으로 나오게 해, 본인이 지은 시와 노인 급제자들이 지은 부를 소리내어 읽게 했다. 「내각일력(內閣日曆)」 1790년 9월 12일 기사에 자세하다.

1811년 11월 3일, 조선 교회에서 북경 주교에게 보낸 이른바 「신미년 백서」에는 이때 임금이 황사영을 불러 보고는 손을 잡고 총애하시며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네 나이가 스무 살이 넘으면 바로 벼슬길에 나와 나를 섬기도록 하라.”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명민한 소년을 임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다시, “국왕은 그를 각별이 아껴 환대의 표시로 그의 손을 잡기까지 하였다. 그런 일은 이 나라에서는 이례적인 총애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알렉시오는 항상 손목에 띠를 두르고 있어야 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이상 함부로 그의 손을 만질 수 없었다.”

그의 무덤 속 청화백자합에 소중하게 담겼던 작은 천 조각은 그가 평생 손목에 감고 다녔던 그 비단의 조각이었을 것이다. 임금은 그를 아껴 사랑해 각별한 총애를 내렸고, 그는 감격해서 평생 어수(御手)가 닿았던 그 손목에 비단을 감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몇 해 뒤 그는 임금 대신 천주의 길을 택했다.



대체 그동안 무엇을 한 게냐?

「신미년 백서」에는 황사영이 스무 살 되던 해인 1794년에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썼다. 이후 그는 과거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시험장에 들어가더라도 백지를 내고 나왔다고 했다. 「승정원일기」 1794년 3월 18일 자 기사에 성균관 밖 유생의 응제시 급제자 명단에 황사영이 나온다. 이틀 뒤인 3월 20일, 임금은 황사영을 접견한 자리에서 그 사이에 부(賦)와 표(表)를 몇 수나 지었느냐고 물었다. 황사영이 표가 50수, 부가 30수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했다. “네가 진사시에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비록 한 달에 한 수만 짓더라도 날짜가 더 남는다. 그동안 대체 무엇을 한 게냐? 책을 읽기는 했느냐?” 임금의 힐난에는 실망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황사영의 이때 나이가 앞서 임금과 출사를 다짐했던 스무 살이었다. 「승정원일기」 1794년 3월 20일 기사에 보인다.

황사영의 아내 정명련(丁命連)은 다산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이었고, 정명련의 어머니는 바로 이벽의 누이였다. 당시 총회장 정약종은 그의 처삼촌이었다.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평창 이씨로 이승훈과 가까운 일족이었다. 이가환의 생질로, 신유옥사에 천주교 신자로 귀양 갔던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그녀의 사촌 동생이었다. 황사영은 천주교 가문의 이른바 성골 혈통이었다.

그는 15세에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한 것은 1794년보다 훨씬 앞선 때부터였을 것이다. 1790년 16세로 진사시에 급제하고 난 뒤 1794년보다 앞선 어느 시점에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과거 시험을 끊었다. 임금 앞에 대답할 당시 황사영의 마음은 앞서 처삼촌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천주에게로 온전히 향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척과 친구들은 침을 뱉고 꾸짖으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듬해인 1795년 4월 18일, 성균관에서 전날 임금의 행차 때 나와 맞이하지 않은 유생 23명에게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자는 요청을 올렸다. 이 23명 중에 황사영의 이름이 두 번째로 올라있다. 이때 그는 이미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성록(日省錄)」에 자세하다.

황사영! 그는 조선 천주교회 차세대의 떠오르는 희망이었다. 신유박해 당시 검거령이 떨어지자,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은 어떻게든 그만은 살려내려고 모든 인맥과 조직을 총동원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그는 지도자급 인물들이 줄줄이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 뒤에도 근 8개월 동안 도피해있다가 9월 29일에 제천 배론 토굴에서 검거되어 끌려왔다.

「사학징의」에 실린 여러 기록들은 당시 의금부가 황사영을 잡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교회 조직에서 황사영의 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27세의 청년 황사영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교회 중심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이 모두 잡혀가도 그만은 지켜내야 할 어떠한 필연성이 있었던 걸까?



「송담유록」과 「눌암기략」의 진술

강세정의 「송담유록」 중 다음 기록에 그 대답이 있다. “죄인 황사영은 나이가 27세인데 아비는 황석범(黃錫範, 1747∼1774)이고, 조부는 황재정(黃在正, 1717~1740)이다. 아울러 세상을 뜬 외조부는 이동운(李東運)이다. 황사영은 정약종의 조카 사위이고, 최창현과는 죽음을 함께 하는 벗이며, 이가환, 이승훈, 홍낙민, 권철신의 혈당이었다. 일찍부터 간사한 자들에게 낚여 사술(邪述)을 몹시 믿어 제례를 폐기하고 천륜(天倫)을 멸절시켰다. 사당(邪黨)의 여러 사적(邪賊)들이 주문모를 맞이해온 이래로 스승으로 섬기고 신부라고 부르면서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받아, 주문모의 도당이 된 자 가운데 으뜸가는 심복이었다.”

「추안급국안」 1801년 10월 10일 자 공초에서 황사영은 자신이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와 처음 만났고, 이후 그는 그의 문하생 되기를 원해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 「송담유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황사영은 입교 이후 당시 천주교회 핵심 인물들과 긴밀한 연계 아래, 주문모의 으뜸가는 심복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 조직에서 신분이 높은 양반층은 대부분 이탈한 상태였다. 주문모 신부는 북경으로 보낼 편지의 작성을 비롯해 교리서의 번역과 보급 등에서 문장에 능하고 식견이 높은 양반층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최창현 등이 있었지만 중인들의 열심한 신앙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눌암기략」을 쓴 이재기의 언급은 더욱 자세하다. “황사영은 만랑(漫浪) 황호(黃, 1604~1656) 집안의 종손이었다. 나이 16세에 진사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가 모두 그 손에서 나와 명성과 영예가 대단히 성대하였다. 하지만 가까운 인척인 정약종과 가까운 친척인 이승훈에게 이끌려, 과거도 그만두고 오로지 사학의 방법만 익혀 밤낮없이 쉬지 않았다.”

이를 이어 이재기는 자신이 황사영의 친삼촌인 황석필(黃錫弼, 1758∼1811)에게 황사영이 서학을 하지 못하도록 말릴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고 썼다. 그러면 황석필은 “전해 들은 말이 지나친 것이요. 어찌 그 정도까지 빠졌겠소”라고 했고, 또 “근래에는 잘못인 줄 깨닫는 듯하오”라며 괜찮아질 거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재기는 이에 대해 다시 “황석필은 강도(江都)에서 밥벌이를 하느라 그 조카와 사는 집이 달라서 그 은밀한 일을 다 밝게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람됨이 차분하고 담백한 데다 진국이어서 번번이 그 조카에게 속임을 당한지라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라고 그를 두둔해 주었다. 사실 이재기는 황석필과는 사돈 간이었다. 황석필의 딸, 즉 황사영의 사촌 여동생이 이재기의 아들 이낙수(李樂脩)에게 시집을 갔다.

이재기가 황석필을 위해 변명을 해준 것은 자기 집안이 천주교와 엮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황석필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학징의」 중 황사영과 관련해 유배 간 사람의 명단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황사영의 숙부인데, 그 형이 출계(出系)한 까닭에 연좌죄는 면했지만, 황사영이 도망간 뒤에도 끝내 간 곳을 가리켜 고하지 않아 여러 달 붙잡지 못하는 정황을 가져왔으니 진실로 지극히 원통하고 해괴하다. 그래서 엄하게 한 차례 형벌을 가하고 정배하였다”고 나온다. 그는 함경도 경흥(慶興) 땅에 유배 갔다.

황석필은 황사영과 8촌 간인 윤종백(尹鍾百)에게 글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윤종백은 황사영에게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배우고, 이희영에게 예수상을 받아, 이후 돈을 받고 예수상을 많이 그려준 죄목으로 1801년 7월 13일에 강릉으로 귀양 갔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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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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