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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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로 돌아와 공부 삼매경, 서양 세계에 대한 견문 넓혀나가

[신 김대건·최양업 전] (16)마카오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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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외방전교회가 운영하던 중국신학교의 신학생들. 지구본을 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최양업·김대건도 조선신학교에서 세계지리와 지리학을 공부하면서 세계를 보는 눈을 떴다.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은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의 소요를 피해 마닐라에서 약 7개월여간 생활한 후 칼르리ㆍ데플레슈ㆍ리브와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1839년 11월 중순 마카오로 돌아왔다. 이후 이들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1842년 2월 15일까지 약 2년여간 르그레즈와ㆍ리브와ㆍ메스트르ㆍ베르뇌 신부에게 교리와 철학, 신학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다시 마카오 조선신학교로

아편 무역 금지 조치로 영국과 청이 전쟁을 불사하는 가운데 1839년 8월 마카오는 급속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영국과 청 사이의 협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역항 거점으로 홍콩에 눈을 돌린 영국은 더는 포르투갈령인 마카오를 위협하지 않았다. 정세가 안정되자 마카오 총독도 여유를 찾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며 제재를 가하던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를 방문해 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와 환담하고 명함을 두고 가기도 했다. 이 놀라운 일에 관해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이제 우리는 확실히 친구가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하기도 했다.(르그레즈와 신부가 1839년 10월 21일 파리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참조)

총독 방문 후 르그레즈와 신부는 필리핀 롤롬보이에서 조선과 코친차이나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던 리브와 신부에게 9월 18일 편지를 보내 “짐을 싸서 마카오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리브와 신부 일행은 대표부장의 명에 따라 그해 11월 중순 마카오로 왔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여전히 마카오에서 숨죽여 생활해야 했고, 외출할 때는 남들이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수단을 벗고 변장을 해야 했다.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는 활기를 찾았다. 조선과 중국, 코친차이나로 파견될 선교사들이 속속 마카오에 도착했다. 조선 선교사로 선발된 페레올(훗날 제3대 조선대목구장이 됨) 신부가 1840년 1월 23일 마카오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2개월여간 머물다가 3월 6일 조선으로 출발했다. 아마도 페레올 신부는 극동대표부에서 사제로 양성되고 있는 최양업과 김대건을 애정을 갖고 눈여겨봤을 것이다. 훗날 편지에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았지만 페레올 신부는 신심 깊고 명석하며 신중한 최양업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그는 선종 직전 김대건 신부와 나란히 묻히길 원할 만큼 깊은 영적 연대를 맺는다.

1840년 9월 21일에는 통킹 선교사로 선발된 베르뇌(훗날 제4대 조선대목구장이 됨) 신부와 아직 선교지를 지정받지 못한 메스트르 신부가 마카오에 도착했다.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 극동대표부에서 통킹말을 배우면서 1841년 1월 통킹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약 3개월 동안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통킹 신학생 1명에게 프랑스 르망교구장 부비에 주교가 저술한 철학 개론서로 철학을 가르쳤다.

메스트르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를 도와 극동대표부 부대표로서 활동했다. 그의 주업무는 유럽과 선교지 사이의 통신과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경비를 보내고, 박해받고 있는 선교지에 새 신부를 파견하는 일을 맡아 했다. 아울러 그는 조선과 중국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 최양업·김대건이 마카오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으로 활동하던 리브와 신부. 그는 최양업·김대건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이제, 최양업과 김대건을 가르쳤던 선교사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덕행과 재능으로 평가해 최양업이 조선에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선 젊은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기대가 어긋나지 않을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최양업) 토마스가 앞으로도 계속 착한 아이로 지내고 또 하느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그는 (조선) 선교지에 유익한 인물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김대건)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늘 위통, 두통, 요통을 앓기 때문입니다.…이뿐만 아니라 그는 판단력이 늘 별로 좋지 않아서 가엾은 데플레슈 신부는 난처해 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토마스 사이에 균형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주교님의 의향을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잘 보살피·려면 수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리브와 신부가 1839년 8월 11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김대건과 최양업은 필리핀에서 마카오 조선신학교로 다시 돌아와 신학0과 서양 학문 공부에 열중했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 특집 드라마 ‘성 김대건’ 중 김대건, 최양업이 마카오 조선신학교에서 스승 사제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장면들. 가톨릭평화신문 DB



세계를 향한 눈을 뜨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선교사들, 특히 스승 신부들의 평가가 어떠하든 최양업과 김대건은 마카오 조선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그리고 인문학과 지리학 등 여러 서양 학문을 배우면서 세계를 향한 눈을 떴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서양 세력이 동양 지배를 확산해 나가는 주요 거점 중 하나인 마카오에서 신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을 공부하면서 직간접으로 서양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수 있었다. 당시 이들은 조선인 가운데 서양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실제로 갖고 있었다. 둘은 스콜라 철학과 이를 기반으로 한 가톨릭 신학을 익혔다. 이 과정에서 둘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서양 사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최양업과 김대건은 리브와 신부와 칼르리 신부로부터 지리학과 지질학, 세계 지리를 배우면서 세계관을 넓혔다. 둘이 습득한 서양 지식은 조선 선교사 영입에 활용됐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성직자가 된 후에도 조선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해로를 그렸다. 특히 김대건은 ‘조선전도’를 그리고, 옥중에서도 조정의 명에 따라 영국의 세계 지도를 번역할 만큼 지리학에 밝았다.

서양 학문을 배운 최양업과 김대건은 서양 교양과 문물에도 개방적이었다. 둘은 다양한 서양의 일반교양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익혔다. 둘은 라틴어 외에도 프랑스어를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배웠다. 김대건의 경우 메스트르 신부의 의견에 따라 파리외방전교회본부 장상들이 프랑스어 공부를 금지시켰다. 메스트르 신부가 김대건에게 프랑스어 학습을 포기하도록 한 것은 선교에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대건은 회화 공부는 포기하더라도 프랑스어 독서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김대건은 최양업이 리브와 신부의 허락을 얻어서 프랑스어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다.

김대건은 르그레즈와 신부에 이어 극동대표부장이 된 리브와 신부에게 시력 보호용 ‘녹색 안경’을 보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최양업도 여행 중에도 사용할 수 있는 가벼운 자명종과 스페인산 밀초 등을 사목에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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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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