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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대건별시 성 김대건 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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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방송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CPBC 라디오 ‘행복을 여는 아침’ 코너로 진행한 퀴즈 대잔치 ‘대건별시’ 결승전 준비가 한창이다. ‘대건별시’는 성 김대건 신부의 이름 ‘대건’과 조선 시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보았던 임시 과거 시험을 일컫는 말인 ‘별시’의 합성어다. 지난 3월 시작한 대건별시 참가를 위해 전국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신자들이 CPBC 라디오의 문을 두드렸다. 총 34명이 치열한 예선을 치렀고, 4명의 월장원자와 패자부활전 승자 2명이 결선 장원전에서 경합한다. 참가자들은 대건별시를 통해 그동안 잘 몰랐던 김대건 신부의 삶과 영성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희년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았다. 대건별시 담당 박현진 PD는 “퀴즈 진행 시간이 오전 9시이다 보니 직장에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는 참가자는 근무 시간인 경우가 있었다”며 “전화 연결로 퀴즈에 참가하는 중간에 직장 상사가 말을 시키거나 가게에 손님이 들어와 황급히 퀴즈를 마쳤던 분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성 김대건 신부 200주년 탄생일(21일) 앞두고 지면을 통해 대건별시 예선 문제를 풀어보며 성인의 삶과 영성을 돌아보자. 대건별시 결선 장원전은 19일 서소문 콘솔레이션홀에서 치러지며, 8월 31일 오전 9시 CPBC 라디오와 9월 3일 오후 1시 TV를 통해 함께할 수 있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해설


1. 주교회의는 2021년을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으로 정하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주제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로 정했다.

 

2. “그들은 저를 잡아 옷을 벗기고 다시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가하다가 관가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고,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김대건 신부의 스무 번째 옥중서한 참조)

 

3. 김대건 성인은 삶의 끝자락에서 편지로 교우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성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천상 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다시금 일깨워주고 날마다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성덕을 쌓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4. 모방 신부는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서양인 선교사다. 얼굴이 조선인과 많이 닮았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고 조선에 입국한 후 교우촌을 돌며 선교를 하였고, 200명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600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중 한 명이 은이에 머물던 소년 김대건이었다.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5. 당시 마카오는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공존하던 국제도시였다. 1732년 파리외방전교회는 마카오에 극동대표부를 설립하여 극동지방 선교 거점으로 삼았다.

 

6. 김대건은 여러 번의 조선 입국 시도가 좌절되자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소팔가자로 돌아가 신학 공부를 계속 했고, 1844년 12월에 중국 장춘에 있는 소팔가자성당에서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7. 배의 돛과 키를 부수는 폭풍우를 만나자 김대건 신부는 선원들에게 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 상본을 들어 보이며 “여기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계시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모 신심에 의탁하면서 극복해 나갔다.(김대건 신부의 열일곱 번째 서한 참조)

 

8. 김가항성당은 1845년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제3대 조선교구장)에게 사제품을 받은 역사적인 장소다. 2001년 도시 개발로 철거됐던 김가항성당이 2016년 수원교구 용인 은이성지에 복원됐다.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성장하고, 세례를 받고(15세), 사제품을 받은 후 처음으로 사목 활동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10. 페레올 주교는  충청도 나바위라는 곳을 통해 입국한다.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 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로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선종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선 교회를 이끈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같은 해 4월 12일에 안성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안장됐다.

 

11.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는 황해도 옹진 순위도에서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앞서 관가에 끌려간 사공들이 겁을 먹고 입을 여는 바람에 김 신부는 양반 행색이었음에도 체포될 때 머리털이 한 움큼 뽑히고 주먹질을 당했다고 한다.

 

12.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돼 헤어진 지 10년 만에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집에 며칠 더 머물다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함께 하고 떠나라고 간곡히 붙잡는다.

 

13. 한양성 밖 남쪽 한강 변에 있던 새남터는 일명 ‘노들’ 혹은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演武場)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 이민식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를 서던 소년이었다.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형에 처해지자 군졸들의 감시를 피해 시신을 거두어 미리내에 안장했고, 평생을 수도자처럼 살며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 선종했다.

 

15. 김대건 신부가 부제 시절 1845년 1∼4월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 입국을 위해 제작한 우리나라 지도. 1861년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16년 앞서 제작된 조선전도는 우리나라 지명을 한국식 발음의 로마자로 표기해 서구 사회에 소개한 첫 번째 지도다. 김대건 신부는 이 지도에서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려넣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뚜렷이 표기함으로써 19세기 중엽에 이미 독도가 우리 고유영토란 사실을 서구 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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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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