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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까지 삼켜버린 프랑스 혁명의 불길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0) 펠리체 자니의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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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체 자니,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1798년, 로마 박물관 소장.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중요한 타도 대상이 된 가톨릭교회와 프랑스의 혁명 정부 간 분위기는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여태껏 맏딸로 여겼던 프랑스의 반항을 견뎌야 했다. 많은 가톨릭 신자가 폭도들의 괴롭힘과 위협을 받았고, 생명의 위험을 느낀 프랑스 귀족들은 로마로 피신했다. 프랑스에서 교황청으로 피신한 가톨릭 신자는 약 6000명에 이르렀다.



혁명 정부, 가톨릭 탄압

1790년 7월 12일, 프랑스 의회는 새 혁명 정부에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에게 충성 서약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했고,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범법자로 내몰았다. 혁명 정부는 가톨릭을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한 축으로 여겼고,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며, 교회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폐지하고 가톨릭 신앙을 국교가 아니라고 선포하며, 수도자들의 수도서원을 금했다.

당시 프랑스 교회의 주교 160명 중 7명만 혁명 정부에 충성 맹세를 했다. 그것은 반대로 그만큼 정부의 엄청난 탄압을 받아야 했다는 걸 의미했다. 혁명 세력은 그때까지도 교황령이던 아비뇽을 침공해 혁명 정부(그들은 ‘공화국’이라고 불렀다)에 귀속시켰고, 교황에게 충성 맹세를 한 60명을 아비뇽의 교황궁에 있는 탑에서 즉결 처형을 했다. 로마 교황청은 ‘대학살’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고, 1791년 프랑스는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

혁명은 계속 진행됐고, 짧은 시간에 무신론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교회와 수도회들은 지속해서 탄압을 받았다. 1792년 9월 2일과 5일 사이에도 유혈사태는 일어났고, 사제 223명이 학살됐다. 프랑스 교계는 교황청을 향해 엑소더스를 시작했다. 1792년에 2000명, 1793년에는 3000명의 성직자가 로마로 이주했다. 사제 4만 명이 강제 추방돼 아프리카 가이아나 등지로 떠났다. 그해(1793년) 루이 16세는 참수형을 당했고, 공화국에 맹세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있던 사제들은 모두 사형됐다. 그때부터 프랑스는 전국적으로 탈-그리스도교화의 물결이 일었고, 1794년에도 20여 명의 사제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795~1796년은 비교적 조용했지만, 1797년에 교회를 향한 칼날은 다시 시작돼 충성 맹세를 요구했고, 거부한 1701명의 성직자는 추방되고, 41명은 사살되었다.



나폴레옹의 로마 침공, 로마 공화국 선언

비오 6세 교황은 유럽의 다른 여러 제후국과 외교 관계를 통해 프랑스 상황을 호전시켜 보려고 노력하는 한편, 로마로 밀려온 프랑스 교계와 프랑스 신자들을 위해 시설을 확충하고 시스템을 개선했다. 당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가톨릭 예술인들도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나폴레옹의 로마 침공’이었다.

1797년 12월 28일, 로마에서 활동하던 자코뱅 당원들과 교황청 군인들 간의 충돌로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의 손님으로 와 있던 프랑스인 사령관 뒤포가 살해됐다. 그의 죽음은 교황청에 대한 나폴레옹의 침공에 당위성을 부여했고, 이듬해인 1798년 2월 10일 베르티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로마를 손쉽게 제압했다. 프랑스군은 바티칸의 예술품들을 약탈했고, 교황의 세속 권력의 소멸을 선포하며, 프랑스식 ‘로마 공화국(1798. 2. 15~1799. 9. 30)’을 선언했다.

로마 공화국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교황령이던 로마를 점령한 프랑스 장군 베르티에가 공화정을 선포하며 건국된 프랑스의 위성국이다. 이것은 교황령 일대에 있던 기존의 공화국들인 ‘안코나 공화국’과 ‘티베리나 공화국’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로마 공화국의 영토는 프랑스가 점령한 교황령 일대였고, 베르티에 장군은 비오 6세 교황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교황은 중립국이던 토스카나 대공국인 시에나로 망명했다. 시에나에 있는 동안 교황은 안전한 차기 콘클라베 개최 장소에 관한 교서를 발표했다. 페르디난도 3세 대공은 로마로 가서 프랑스 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교황은 시에나를 떠나야 했다. 거의 체포 상태로 피렌체 남쪽 3㎞ 지점에 있는 성 카쉬아노의 체르토사 수도원에 감금됐다. 2명의 프랑스 군인이 교황을 감시했고, 교황은 병이 깊어 걸을 수도 없었다.

1799년 3월, 프랑스는 이번에는 교황이 있는 토스카나 대공국을 침공했고 페르디난도 3세가 망명하는 시점에서 교황도 토스카나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교황은 81세의 노구에 걸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프랑스군은 그런 교황을 열 곳이 넘게 끌고 다녔고, 종종 교황을 백성에게 노출 시켜 백성들의 반응을 보았다. 백성들은 교황을 열렬히 지지하고 환호했다. 프랑스 정부는 교황을 반기지 않을 만한 도시로, 프랑스 중부의 디종까지 끌고 왔다. 교황은 디종에 도착한 지 열흘 만인 8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



신고전주의 대표 작가로 화가이며 장식가

소개하는 그림은 제목이 조금 긴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Altare patrio a piazza San Pietro per la Festa della Federazione, 1798년)’이라는 작품이다. 신고전주의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이탈리아 파비아 출신 화가이며 장식가 펠리체 자니(Felice Giani, 1758~1823)가 목판에 그린 유화다. 현재 로마 박물관(Museo di Roma)에 있다.

화가는 어릴 적부터 비안키와 다 비비에나 밑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볼로냐에서 페드리니와 간돌피 지도로 숙련된 기술을 익혔다. 1780년 로마로 이주해 팜필리 공작의 도움으로 여러 유명한 작가들과 친분을 쌓고 중요한 작업에 참여했다. 대개 건물의 내부 장식이었고, 그를 이 분야의 대가로 만들어 주었다. 후에 그는 파엔자, 볼로냐, 다시 로마(1788~1794)에서 활동했고, 나폴리, 에르콜라노, 폼페이 등지를 여행하며 고전주의 스타일을 심화했다.

1803년, 나폴레옹 행정부의 건물 장식하기 위해 파리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잠시 파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1811년 로마의 성 루카 아카데미 명예 학자가 되고, 1819년에는 교황청 판테온 명인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1823년 볼로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그 후유증으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성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 묻혔다.



그림 속으로

그림은 1798년 2월 10일 프랑스가 로마를 점령하고, 3월 20일 혁명 정부의 수립을 기념하는 축제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개최한 것이 배경이다. 화가는 교황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종교와는 무관한 제단을 만들고, 백성을 동원하고 군사 행렬을 하는 등 혁명 정부가 교회를 어떻게 유린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행사는 한 달 전에 탄생한 로마 공화국을 기념하고, 자유 획득을 축하하는 세속 행사였다. 그 자리에서 헌법이 공표되고, 구체제의 상징들이라며 반-혁명주의 책과 귀족 증명서 및 종교재판 목록과 로마 귀족의 「황금의 서(書)」가 모두 불 속에 던져졌다. 로마 백성이 바로크 시대에 즐기던 웅장하게 묘사된 무대 장식에 종이로 만든 기둥과 동상, 거기에 불꽃놀이를 하던 전통을 빌려 공화국의 기묘한 행사를 연 것이다. 시민들은 성별, 나이별로 4개 그룹으로 나누어 제단을 향해 올라가고, 오른쪽 끝에는 구체제를 정화한다며 불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왼쪽에는 제단을 향해 전진하는 기마 부대가 도착했고, 나폴레옹 내각의 의원들과 대표들이 북을 치며 그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림은 역사 기록의 측면과 풍부한 세부 묘사를 통해, 그림 속 장면에 화가가 참여했다는 걸 말해준다. 화가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며 혁명 정부를 호의적으로 선전하는 데 앞장선 작가였다. 같은 시기에 같은 작가가 ‘천사의 성 다리’에 세운 ‘개선문’을 그린, 비슷한 또 하나의 작품도 로마 박물관에 있다.

그러나 이런 선전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부재와 사망에 대한 반감으로 프랑스의 점령에 대한 로마와 이탈리아인들의 저항은 날로 커졌고, 혁명 정부는 결국 1799년 9월 30일 로마 공화국의 철폐를 선언했다.

교황은 다시 로마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반 인질 상태로 있었다. 그 시기,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카를 마크 폰 라이베리히(Karl Mack von Leiberich) 장군이 이끄는 7만여 병력이 나폴리 왕국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교황권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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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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