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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 조선에서 직접 사제 양성하려 했으나 기해박해로 물거품

[신 김대건·최양업 전] (17)조선에서의 사제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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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생활한 서울 후동의 정하상 집은 조선 교회 첫 주교관이자 신학교였다. 사진은 후동 입구인 오늘날 청계천 배오개다리 주변 모습.



이번 호에서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최양업ㆍ김대건과 별도로 조선 교회 안에서 신학생들을 선발해 사제로 양성하려 했던 계획을 살펴보기로 하자.


▲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1월 30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다음날인 12월 1일에는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지아코모 필리포 프란소니(Giacomo Filippo Fransoni)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앵베르 주교는 이 두 편지에서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보고했다. 마카오에 있는 3명의 조선 신학생(당시 앵베르 주교는 최방제가 선종한 사실을 몰랐다)이 사제가 되어 귀국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조선에서 직접 사제를 양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과 파리외방전교회 장상들에게 자신이 조선에 입국한 직후부터 이미 신학생들을 선발해 양성하고 있다고 밝힌다.

“제가 아주 열망하는 일은 현지인 사제를 갖는 일입니다. 모방 신부가 작년에 마카오로 보낸 세 명의 소년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통킹 지방에서 베리트의 명의주교님이 한 것처럼, 또 우리 전교회 초창기의 다른 대목구장들이 한 것처럼 저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사제가 될 만한 중년 몇 명을 물색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제가 몇 명의 적합한 사람을 뽑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아멜 신부님이 한문으로 번역한 책으로 신학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3년만 있으면 서품식을 거행할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1838년 11월 30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쓴 편지에서)

“저는 젊고 평판이 좋은 회장들 네 명을 가려 뽑아 그들에게 라틴어 공부를 시킬 작정입니다. 두 사람은 8개월간 라틴어 읽기를 배워서 아주 유창하게 말합니다. 이제 11월 1일부터는 한문으로 쓰인 신학 공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교육하기가 저에게 고된 일이나 이런 수고는 매우 즐겁습니다. 10명쯤 가르쳤으면 좋겠으나 찾을 수가 없으며 박해의 위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 놓을 수도 없습니다.”(1838년 12월 1일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쓴 편지에서)




앵베르 주교가 선발한 신학생 4명

앵베르 주교는 앞의 두 편지에서 자신이 선발한 네 명의 신학생을 소개한다. 하지만 편지가 발각돼 신학생들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그들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선발한 4명의 신학생 가운데 첫째는 연락원으로 북경을 오갔으며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안내한 사람으로 나이는 42세로 독신이며, 1801년 박해 때 순교한 정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이라고 했다. 둘째는 32세 홀아비로 1784년에 조선 사람 중에 첫 번째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조국에 천주교를 도입한 이 베드로의 손자라고 했다. 나머지 두 명은 26세, 20세 청년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앵베르 주교가 밝힌 첫째 인물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이다. 둘째 인물은 앵베르 주교가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라고 밝힌 것을 근거로 교회사학자들은 ‘이재의 토마스’라고 인정한다. 이재의는 앵베르 주교의 복사로 일하면서 주교의 사목 활동을 도왔다. 그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해 현석문이 「기해일기」를 쓰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또 김대건 부제의 조선 입국을 돕고, 김대건 부제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귀국하는 등 김대건 신부를 아낌없이 도우며 교회 재건에 힘쓴 인물이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가 밝힌 둘째 인물이 이재의라고 단정하기에는 의문이 있다. 이재의는 1785년생이다. 앵베르 주교가 위의 편지에서 둘째 인물을 32세 홀아비라고 했는데, 1838년 이재의는 53세였다. 나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정하상보다 10살이나 위이다.

또 앵베르 주교가 선발한 26세, 20세 신학생들은 이문우(요한)와 최형(베드로)이라는 주장도 있다.(「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54쪽, 각주 129 참조) 이문우(1810~1840)는 앵베르 주교에게 회장으로 임명돼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에 힘썼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앵베르 주교에게 보고하던 중 체포돼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1838년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최형(1814~1866)은 최방제의 형으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또 김대건 부제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입국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으나 석방된 후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 책임자로 일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1838년 그는 24세였다. 이문우와 최형은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따라서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서 직접 선발한 4명의 신학생 중 정하상을 제외한 3명은 누구인지 좀더 연구해 볼 과제이다.



신학생 교육과 기해박해

앵베르 주교는 선발한 신학생들을 어디서 교육했을까? 바로 자신이 거처하던 한양 후동 주교관이다. 이 집 주인은 정하상이었다. 한국 교회 첫 주교관이자 신학교였다.

1837년 12월 16일 조선에 입국해 12월 31일 한양에 도착한 앵베르 주교는 6년간 중국과 티벳 국경 지대인 목평에서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에 신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정하상과 이승훈의 손자로 알려진 32세 홀아비를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1838년 여름까지 8개월간 라틴어를 배운 둘은 유창하게 라틴말을 하게 됐다. 앵베르 주교는 이들에게 그해 11월부터 아멜 신부가 중국인 신학생들을 위해 한문으로 번역한 페르쇼 주교의 「교의 및 윤리 신학」을 교재로 신학을 가르쳤다. 「교의 및 윤리 신학」은 가톨릭 교리와 윤리, 우상 숭배와 미신에 관한 교회 가르침, 개신교의 오류 등에 관해 문답식으로 해설한 책이다.

앵베르 주교는 또 20대 청년 2명을 선발해 라틴어를 가르쳤고, 1839년에는 15~16세 소년 3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의 이러한 사제 양성 계획은 1839년 기해박해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 대다수가 순교하면서 조선 교회가 풍비박산됐기 때문이다.



앵베르 주교의 계획은 어떻게 가능했나

앵베르 주교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조선에서 정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소년이 아닌 교회 안에 명망 높은 중년 독신 남성들을 선발해 라틴어 읽기와 신학을 간단히 가르쳐 사제품을 주려고 했다. 앵베르 주교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시도했을까? 당시 보편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령에 따라 신학교 운영과 사제 서품에 관한 상세한 규칙이 확립돼 있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제품을 받으려면 삭발례를 받은 이후부터 수문품, 독서품, 구마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의 6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또 차부제는 만 22세, 부제는 23세, 사제는 25세 이전에 서품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신학원에 입학한 신학생들은 문법, 성가, 교회 전례력 계산법과 다른 유용한 과목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성경, 교회 서적, 성인들의 강론, 성사 집행, 전례 예식 양식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앵베르 주교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파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시행한다. 그는 앞의 두 편지에서 다음의 근거를 제시하면 자신의 정당성을 밝힌다. 앵베르 주교는 두 편지에서 “통킹에 계셨던 베르트 명의주교님과 우리의 첫 대목구장들의 모범을 따라서”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나이 든 남자 후보자를 물색했다고 한다.

베리트의 명의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피에르 랑베르 드라 모트(1624~1679) 주교이다. 포교성성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들과 지역 교회의 첫 대목구장들은 선교 지역의 교회가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현지인 사제들을 양성해 동포들에게 선교 활동할 벌이게 하는 ‘특별 권한’을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특별 권한 중 하나가 대목구장이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만 갖춘 현지인 지망자를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활동 지침서」(모니타)는 선교지에서 신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특정 선교사에게 개별적으로 교육을 받은 검증된 교리교사(회장)에게도 사제 서품 가능성이 주어진다고 규정했다.

앵베르 주교는 이를 근거로 조선 교회 장래를 위해 일차적으로 덕망있는 회장들을 선발 교육해 사제품을 주어 교회를 안정화하고, 별도로 어린 신학생들을 선발해 마카오 등지에서 정규 신학 교육을 받게 한 다음 사제품을 줘 자립 교회로 성장시킨다는 두 가지 방안을 시행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가 한문 신학 서적으로 조선인 신학생들을 교육한 것도 우리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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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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