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17) 신비로운 행렬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마텔다와 단테는 강의 양 기슭 위쪽으로 나란히 걸어간다. 두 사람의 걸음이 합하여 100보가 되었을 때, 번개 같은 빛이 숲 가운데로 퍼진다. 음악 소리가 들리고, 일곱 그루의 황금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 다가온다. 그 목소리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환호인 ‘호산나’(우리에게 구원을)(마태 21,9)를 노래하고 있었고, 나무들은 사실 일곱 개의 촛대였다. 그 촛대들 위에는 불꽃이 달보다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촛대들은 「요한 묵시록」(1,4.12)의 예언적 환시를 암시한다. 촛대들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다.(묵시 4,5)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이사 11,2) 단테는 경탄으로 가득 차 사부를 향해 돌아서자 그 역시 너무 놀라 멍한 눈으로 단테를 바라본다.

단테는 신비로운 행렬을 본다. 먼저 구약성경을 상징하는 스물네 명의 장로가 새하얀 옷을 입고 임신한 마리아를 찬미하며 둘씩 짝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시기로 되어있는 구세주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백합꽃 화관을 쓰고 있다(묵시 4,4).



그들은 모두 노래하였으니 “아담의

딸들 중에 그대는 행복하다. 그대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축복받으리다!”

(연옥 29, 85-87)



여기서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님에게 드린 인사가 메아리친다.(루카 1,28) 단테는 “여인들 가운데서”(루카 1,42)를 “아담의 딸들 중에”로 바꾸었다. 지금 여기는 에덴동산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14,26)에서 에덴동산의 즐거움은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낙원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었다. … 누구도 늙지 않게 생명의 나무가 있었다. 육신에는 최고의 건강, 마음에는 최고의 평안이 있었다. … 참다운 즐거움이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영속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깨끗한 마음과 고운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난 애덕으로 하느님을 향해 불타고 있었다.”

그 뒤로는 네 복음서를 상징하는 네 마리의 짐승이 초록 잎사귀를 머리에 두르고 뒤따랐다. 스물네 장로가 신앙의 색깔인 하얀 관을 쓰고 있다면, 네 복음서 저자들은 희망의 색깔인 초록색 관을 쓰고 있다.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1티모 1,1)와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각 짐승마다 세라핌처럼 여섯 개의 날개가 돋아있고, 날개마다 눈들이 가득했다.(묵시 4,6) 네 짐승들은 복음사가들을 가리킨다. 즉 사람의 모습은 마태오, 사자는 마르코, 소는 루카, 독수리는 요한의 상징적 부속물이다.

그 네 마리 짐승들 사이 한가운데 바퀴가 둘 달린 승리의 수레가 그리프스의 목에 매달려 끌려오고 있었다. 수레는 개선 교회를 가리키며, 두 바퀴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 혹은 성직자와 신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세비야의 이시도루스의 「어원록」(12,2,17)에 따르면, 그리프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나타내는데, 황금 독수리의 날개와 머리 부분은 신성을(아가 5,11), 붉은색이 뒤섞인 하얀색 사자는 인성을 가리킨다(동 5,10). 그리프스의 양쪽 날개는 삼위일체의 상징인 세 줄기 띠 사이로 펼쳐져 있는데 한가운데 띠와 합치면 인성을 뜻하는 4가 된다. 날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치솟았다고 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이윽고 행렬이 멈춰 선다. 오른쪽 바퀴 옆으로는 세 여인 즉 향주(向主) 3덕인 신망애(信望愛)가 춤을 추고 있다. 믿음은 흰색, 희망은 파란색, 사랑은 빨간색이다. 사랑은 으뜸가는 덕으로 리더가 된다.(1코린 13,13)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애덕은 모든 덕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 왜냐하면 신앙과 희망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는 그 무엇을 통해서 하느님과 관련을 갖지만, 애덕은 그 자체로서 하느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신학대전」 II-II,23,6)

왼쪽 바퀴 옆에는 자줏빛 옷을 입은 네 여인 즉 사추덕(四樞德 :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이 춤을 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교도의 윤리덕과 그리스도교의 윤리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획득된(acquired) 윤리덕들은 사랑 없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연적 질서권 내에 폐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초자연적 질서에 관한 주입된(infused) 덕은 사랑 없이는 있을 수 없다.”(동 I-II,65,2)

모든 행렬 뒤에는 두 노인 즉 의사인 성 루카가 쓴 「사도행전」과 말씀의 칼(히브 4,12; 에페6,17)을 들고 있는 성 바오로의 서간들이 보인다. 칼은 또한 성 바오로의 순교도 상징한다. 뒤이어 소박한 차림의 네 노인(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의 편지들)과 마지막으로 예리한 얼굴로 자면서 걷는 한 노인(묵시 1,10)이 그 뒤를 따른다. 이 일곱 명의 노인은 장미와 다른 빨간 꽃들을 두르고 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보면, 구약성경(신앙)은 그리스도를 앞서고, 복음서들(희망)은 그리스도의 옆에 서 있으며, 서간들(사랑)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른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1-08-2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17

마태 10장 7절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