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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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곤호가 머문 주산도 정해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신 김대건·최양업 전} (20)주산도 정해에서 오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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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주산열도에 2개월간 체류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주산열도. 강화군 블로그 캡쳐



신학생 김대건과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가 탄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는 대만을 지나쳐 1842년 5월 11일 중국 절강성 관문인 주산열도 정해(定海)항에 도착했다. 정해는 홍콩처럼 영국군이 1841년 10월 점령한 후 1842년 2월 10일부터 해군 기지를 자유무역항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정해항은 수심이 깊으면서도 조수 간만의 차가 별로 없고, 강풍이나 해일을 피하고자 육지로 둘러싸인 내해에 자리하고 있어 강풍이나 해일의 영향이 적어 해군 기지로서는 가장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춘 항구였다. 그래서 정해는 예로부터 해상 교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해는 신라 시대 때부터 당나라와 교류하던 무역 해상로의 거점이었다. 당시 돛배로 주산도 정해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 만에 동중국해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5일이면 흑산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당서」에는 서기 816년 신라 헌덕왕 8년 때 흉년이 든 신라인 170명이 먹을 것을 찾아 배를 타고 절강으로 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1123년 고려 인종 1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개성으로 간 바닷길이 바로 이 해로였다고 밝히고 있다.

▲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주산열도에 2개월 간 체류했다. 사진은 1200년의 역사를 간직해온 정해 고궁으로 신학생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정해에 머무는 동안 이 거리를 다녔을 것이다. 강화군 블로그 캡쳐





42일간 주산도 정해에 체류

21세 청년 김대건이 선조들이 왕래했던 정해에 발을 디뎠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6월 21일 에리곤호가 오송(吳淞)으로 출항할 때까지 42일간 주산도 정해에 머문다.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안타깝게도 신학생 김대건이 주산도에 머무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가 유실돼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김대건이 1842년 12월 9일 요동 백가점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주산도에 머물면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주산은 산이 많고 메마른 많은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내 구경도 하고 또 얼마 전에 부임하신 라자리스트 신부님을 만나볼 겸 해서 주산 시내에 몇 번 들어갔는데, 원주민들 외에는 신기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원주민들을 ‘검은 악마’라 부르고 멸시해 왕처럼 손에 지팡이를 잡고 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산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 다니쿠르 주교



다니쿠르 신부와 고틀랑 신부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이 주산에서 만난 라자로회 신부가 프랑수아 자비에르 티모티 다니쿠르(1806~1860)임을 알려준다. 프랑스인인 다니쿠르 신부는 1834년 마카오로 와서 라자로회가 운영하는 성 요셉 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그는 김대건 일행보다 9일 전인 1842년 5월 2일 주산으로 와서 중국인 구제국(邱濟國)ㆍ왕약한(王若翰) 신부와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4년간 주산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46년 절강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돼 영파로 소임지를 옮겼고, 1849년부터 1854년까지 절강대목구장으로 사목했다. 그는 1854년 5월 복자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강서대목구장으로 임명돼 1860년까지 사목하다 파리에서 선종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1842년 10월 2일 강남 장가루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산에서 예수회 대표 신부를 만났고, 그도 6월 21일 정해를 떠날 때까지 체류했다”고 썼다. 이 예수회 대표 신부는 누굴까? 바로 프랑스 예수회 출신인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1803~1856) 신부이다. 그는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출신 베지 주교의 초청으로 1842년 프랑스 예수회원 최초로 상해와 강남 선교사로 파견됐다. 베지 주교는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부터 1839년 산동대목구장 겸 남경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인물이다.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과 마카오에서부터 맺은 인연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갔다. 그는 1842년 6월 에리곤호가 상해에 머물 때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를 안내해 여러 교우촌을 방문했다.

또 김대건 부제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입국시키고자 조선 신자 11명과 함께 배를 타고 1845년 6월 상해에 도착했다. 당시 김대건 부제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해 중국 배의 도움으로 오송을 거쳐 상해로 왔다. 김대건 부제는 영국 영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곤란한 처지였다. 김대건 부제가 중국 배 선주에게 상해까지 데려다 주면 1000피아스터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대건은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기 전 고틀랑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고틀랑 신부는 이 편지를 받고 김대건 부제 일행이 묵고 있는 상해 교우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김대건 일행이 생필품을 사는 데 필요한 돈 580원을 김대건에게 쥐여줬다. 그리고 고틀랑 신부는 중국 관헌들에게 들킬까 봐 겁을 먹은 집 주인을 배려해 김대건 일행에게 타고 온 배에서 유숙할 것을 권했다. 고틀랑 신부도 함께 배로 가서 조선 신자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밤을 새우며 조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의 사제 서품식에도, 그의 첫 미사에도 참여했다. 김대건 신부와 고틀랑 신부의 인연은 김대건 신부 사제 서품식 때 다시 한 번 자세히 소개하겠다.



나흘 걸려 오송에 도착

신학생 김대건과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 그리고 예수회 고틀랑 신부가 주산도에 머물고 있을 때 양자강에서는 영국군과 청군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영국군은 1842년 5월 18일 절강성 사포(乍浦)를 무너뜨렸고, 6월 16일에는 오송(吳淞)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3일 뒤인 6월 19일 상해(上海)를 점령했다.

세실 함장은 상해가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 1842년 6월 21일 에리곤호를 출항시켰다. 에리곤호는 주산도 정해를 떠나 양자강 하구의 오송항을 향했다. 신학생 김대건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주산에서 돛을 펴고 출범해 영국 함선 20척과 함께 양자강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주산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동안에 영국인들이 남경을 탐험하기 위해 출발했으므로 우리도 그들을 따라 나흘 걸려 양자강에 도착했습니다.”(1842년 9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와 1842년 12월 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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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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