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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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중국을 담담히 지켜보다

[신 김대건·최양업 전] (21)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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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2년 7월 21일 영국군이 파상공세로 진강을 함락했다. 항전한 청군은 가족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그림은 영국군이 진강 서쪽 문을 통해 상륙하고 있는 모습.

▲ 제1차 아편전쟁을 지휘한 영국의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



신학생 김대건과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는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를 타고 중국을 항해하면서 아편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김대건 일행이 주산도에 도착한 1842년 5월 11일부터 영국 함선 20척과 함께 양자강을 따라 오송(吳淞)에 도착한 뒤 8월 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4개월간은 제1차 아편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였다.



영국군, 청나라 공격


영국의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는 25척의 군함과 14척의 철제 윤선(輪船), 9척의 보급선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청나라 도광제도 정규군 1만 2000여 명과 지방 의용군인 향용(鄕勇) 3만 3000여 명을 조직해 영국군에 맞섰다. 영국군은 철제 증기 군함과 대포, 로켓탄, 포도탄(9개의 작은 탄환으로 채워진 포탄) 등 최신 무기로 무장했다. 청군도 30문의 총과 8㎏ 포로 무장한 2층 갑판선 등 근대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으나 군기가 엉망이었다. 청군 총사령관 혁경(奕經)은 공격 개시일을 제비뽑기로 정했고, 지휘관의 북경 표준어를 알아듣지 못한 향용들은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영국군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가 몰살됐다. 청군의 한 장군은 가마 위에서 아편에 취한 채 지휘했고, 그의 병사들은 영국군의 포성을 듣자마자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주산도를 탈환하기 위해 출항한 수군들은 항구를 떠나자마자 대부분 뱃멀미를 했고, 함장은 영국군을 만날까 봐 20여 일간 영파(寧波) 앞바다에서 배를 몰고 왔다 갔다 하며 정기적으로 거짓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김대건 일행이 주산도 정해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뒤인 1842년 5월 18일 영국군은 사포(乍浦)를 공격해 그날 함락했다. 영국군과 그들의 부역꾼들은 10일간 사포를 약탈했다. 부녀자들을 욕보이고,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영국군은 5월 28일 장강 하구의 최고 군사 요충지인 오송을 치기 위해 사포에서 북진했다. 청군은 이에 보산(寶山)과 숭명(崇明), 상해(上海)의 요새를 보강하고 오송구(吳淞口)에 삼각형으로 양자강 전체 포대보다 더 많은 포를 배치했다. 하지만 6월 16일 아침 6시 전투를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양강총독 우감(牛)과 그의 군대는 도망쳤다. 오직 강남총독 진화성(陣化成)과 병사 88명만이 남아 투항하지 않고 항전하다 모두 전사했다. 오송이 함락되자 상해 관리와 부호들이 모두 도망쳤다. 영국군은 6월 19일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공격해 상해를 점령했다. 영국군은 4일간 상해를 약탈한 후 6월 23일 오송으로 돌아왔다.

바로 이날 김대건 일행을 태운 에리곤호가 오송구에 도착했고, 3일 후인 6월 26일 오송항에 정박했다. 정해와 오송, 상해 전투 등 제1차 아편전쟁에서 맹공을 펼친 영국 군함 네메시스호의 윌리암 허치천 홀(William Hutcheon Hall) 함장은 “6월 23일 우리 군대는 상해에서 오송으로 돌아왔다.…곧이어 프랑스 전함 두 척, 세실이 이끄는 에리곤호(대포 44문)와 파지가 이끄는 파보리트호(대포 18문)가 우리의 동태를 살펴볼 목적으로 오송에 도착했다”고 전투항해일지에 기록했다.

이렇듯 김대건 일행은 오송 전투가 끝난 지 1주일 뒤, 영국군이 상해를 함락한 지 4일 뒤 오송구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오송 전투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아주 건조하게 보고하고 있다. “양자강 오른쪽에 두 개의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보산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오송구라고 합니다. 오송구는 양자강의 황해 어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시는 영국군들의 공격으로 주민들은 모두 피난해 텅 비었고 전투 때문에 파괴되어 있었습니다.…그동안에 우리는 출발할 날을 고대하며 오송구에서 퍽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1842년 12월 9일 요동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전쟁의 참상을 본 김대건이 “퍽 지루하다”는 표현이 놀랍다. 김대건의 이런 반응에 대해 그가 서구 중심적 사고에 젖어있는 단면을 보여준다고 평하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영국의 파상공세


상해를 점령하고 오송으로 돌아온 영국군은 진강(鎭江) 공격을 준비했다. 7월 초까지 진강까지 수로를 탐색한 영국군은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오송에 남겨두고 진강으로 진격했다. 7월 21일 영국군은 파상공세를 펼쳐 진강을 함락했다. 이때 청군들도 용맹히 저항했다. 전세가 기울자 청군은 적에게 능욕을 당하지 않도록 가족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이 광경을 본 영국군 휴 고프(Hugh Gough) 장군은 “나는 진심으로 전쟁을 깊이 혐오한다”고 적었다.

영국군의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전사자와 부상자 수도 적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콜레라와 말라리아 등 전염병과 풍토병에 걸린 환자들이 심각하게 발생했다. 이에 영국군은 신속하게 군을 정비해 8월 11일 남경을 봉쇄했다.

사실, 제1차 아편전쟁이 확대되자 청 조정은 ‘결사항전’과 ‘강화’를 요구하는 두 부류로 갈렸다. 도광제는 ‘무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는 적과 화해하는 것은 결국 정복되거나, 아니면 황족이 제위를 계승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어 백성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는 황실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위기만 벗어나고자 하는 유화 정책은 제국과 황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도광제는 그렇게 명이 청에 망했기 때문에 자신의 왕조도 망할까 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도광제는 진강이 함락되고 수비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족인 기영(耆英)에게 강화 회담을 진행할 전권을 위임했다. 8월 11일 새벽 영국군이 남경 공격을 시작하려 할 때 이리포(伊裏布)의 시종인 장희와 몇몇이 숨을 가누지 못한 채 강둑을 따라 영국군 진영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영국군에게 흠차대신 기영이 곧 담판하려고 온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러면서 영국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청은 영국의 요구 조항에 동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영국군 통역관 모리슨이 만일 필요하다면 영국군은 양자강을 거슬러 쳐들어갈 것이라고 위협했다. 장희는 이 말에 굴하지 않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청 황제는 백성을 무장시키고 모든 풀 포기들이 병사가 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기 싸움 끝에 영국과 청은 남경 봉쇄 하루만인 1842년 8월 12일 협상에 들어가 8월 29일 조약을 체결한다.



김대건, 전쟁 현장을 가다


김대건은 남경조약 협상이 한창일 때 하루 동안 진장을 다녀왔다. 그는 “진강부에 도착해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였는데, 전쟁으로도 파괴되고 강도들의 습격으로도 약탈당하여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났습니다”(같은 편지)라고 적었다. 전쟁의 참상이나 죄 없는 민중들의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 등은 단 한 자도 표현돼 있지 않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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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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