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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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난민 정착기] 바늘구멍 통과한 1.5% ‘대한난민’ 앞에 놓인 장벽

[1부 그들의 밥벌이] 기자·교사 등 이력은 온데간데없고 일자리 찾아 전국 떠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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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출신의 이집트 난민 인정자 샤이마씨와 칼리드씨, 그리고 딸 노라이양.

 

1194명. 2022년 4월 기준 대한민국이 인정한 난민의 수다. 전체 난민 신청자의 단 1.5%. 이 땅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이들을 우리는 ‘대한난민’이라 부르기로 했다.
 

전쟁과 종교, 인종, 기후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유로 세계 곳곳에서 난민은 계속 늘고 있다. 한국은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까.
 

우리나라가 UN 난민협약**에 가입한 건 30년 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난민을 환대하기로 국제 사회에 약속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대한난민을 잘 모른다.
 

CPBC는 난민 인정자, ‘대한난민’에 주목했다. 그들은 수많은 난민 신청자가 꿈꾸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취재팀은 4~6월, 전국에 흩어져 사는 대한난민들을 만났다. 난민들의 이야기를 4회에 걸쳐 지면에 연재한다.


*난민인정=난민은 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박해 위협으로 본국에 돌아갈 수 없는 외국인을 말한다. 난민 인정은 ①인종 ②종교 ③국적 ④정치 ⑤특정 사회집단 신분 다섯 가지 사유로 가능하다.

**UN 난민협약=UN에서 1951년 채택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다. 난민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고 난민의 보호를 확대하기 위해 마련된 협약이다. 우리나라는 1992년에 가입했다.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우리나라는 2012년 아시아 최초로 독립된 난민협약 이행 법률인 ‘난민법’을 제정했다. 난민법은 기존 난민제도의 비판을 보완해 입법했지만, 여전히 한계점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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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들의 밥벌이

2부 말해야 산다

3부 이웃이 될 수 있을까

4부 두 개의 진실과 하나의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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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팀= 총괄팀장 : 백영민/ 기사 : 박수정, 전은지, 김형준, 이학주/ 사진 : 남궁현/ 웹페이지 : 전기환, 임해든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대한난민 정착기’를 인터랙티브로 구현한 홈페이지(2022refugee.cpbc.co.kr)로 연결됩니다.
https://www.cpbc.co.kr/html/2022refugee/



제1부 그들의 밥벌이

 

 

대한난민 샤이마·칼리드 부부(이집트 출신)

 

▲ 본국에서 박해를 받았던 당시 부부가 쓴 기사들은 아직도 온라인 상에 남아있다.

 

샤이마(33)씨와 칼리드(38)씨는 이집트에서 왔다. 부부는 기자였다. 이집트에 들어오는 시리아 난민을 취재했던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그런 부부가 한국에 와선 입장이 정반대가 됐다.

취재원이 된 건 처음인 듯 샤이마씨가 멋쩍게 웃었다. 남편 칼리드씨도 대답하면서 연신 땀을 훔쳤다. 아빠와 엄마 사이의 품에 딸 노라이(8)양이 파고들었다. 노라이양을 바라보는 부부의 눈에선 요즘 말로 꿀이 뚝뚝 떨어진다. 대한민국의 여느 ‘딸바보’ 부모와 다르지 않다.

샤이마씨와 칼리드씨는 이집트 ‘라스드 뉴스 네트워크’ 등 군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에 근무했다. 아랍의 봄 이후 2013년 이집트에선 군부가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잡았다. 진보언론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쿠데타를 방송에서 다루는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회사에 있던 동료들은 붙잡혀갔습니다.”(샤이마)

 

군부의 압박으로 1500명의 동료가 펜을 놨다. 통신사는 문을 닫았다. 다른 언론사들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군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부부는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군부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들어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이들은 결국 이집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는 비자가 필요 없던 대한민국. 신분을 숨기고 감시망을 피해 다니는 부부에겐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그리고 4년 만인 올해 4월 1일. 부부는 ‘난민 인정’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해 대한난민이 됐다. 이집트의 상황을 고발하는 현지 온라인 기사로 부부가 겪었던 박해 상황을 소명할 수 있게 돼서다.

 

취재 현장에서 생산 현장으로
 

한국에 온 샤이마씨는 난생처음 작업복을 입었다. 칼리드씨도 마찬가지였다. 샤이마씨는 자동차 공장에서, 칼리드씨는 광학 제품 공장에서 일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샤이마씨는 손이 느리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잘리기도 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낯선 땅에서 난생처음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부부를 모질게 밀어붙였다.

 

“난민 인정자들이 말합니다. ‘바뀐 게 없다’고.”

 

난민을 돕는 아시아평화를향한이주(MAP) 김영아(마리아) 대표의 말이다. 난민 신청자 신분에서 받는 G-1 임시비자는 근무 직종을 단순 노무직으로 한정한다. 하지만 난민 인정(F-2 비자)을 받고 직종 제한이 해제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은 난민법 35·36조****에 따라 난민에게 본국에서 취득한 학위나 경력 등 자격을 인정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자격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인정해 활용한다는 내용은 없다. 대학원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기자 샤이마가 한국에선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자리 찾아 계속되는 떠돌이 생활
 

박해를 피해 이집트 전국을 떠돌았던 부부는 한국에서도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부부는 목포와 서울, 인천, 울산을 거쳐 현재 경남 양산에 둥지를 틀었다. 떠돌았던 이유는 단 하나. 일자리 때문이었다. 이는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 온 난민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아 자주 거처를 옮긴다.

고국에서 쫓겨나다시피 탈출한 난민에게 재산이랄 게 있을 리 없다. 그나마 가진 돈도 난민 인정을 받는 동안 생활비로 써야 하니 금세 바닥이 난다. 한국에서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난민들은 “구직 과정에서 국가의 도움은 전혀 없다(Not at all)”고 입을 모은다.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도입한 대한민국의 이면이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변호사는 “법무부가 주무부처인데 난민 인정자 정착을 위한 예산은 0원”이라고 지적했다.

 

 

▲ 서울 대림동 일대의 직업소개소. 많은 난민들은 국가의 도움 없이 브로커들을 통해 일을 구한다.

 

 

생계가 걸린 구직 활동
 

“브로커를 통해 일을 구했어요.
서울 대림동에  브로커가 엄청 많아요.

근데 막상 일터는 서울이 아니고  먼 지방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칼리드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난민들이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 곳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소개소다. 이곳에서 브로커가 가져가는 수수료는 많게는 30만 원 선. 봉급이 늘면 브로커는 그만큼 수수료를 더 떼어간다.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천에 살던 칼리드씨는 정규직 자리를 소개받아 목포까지 갔지만, 가서 보니 단순 아르바이트 일자리였다. 항의할 곳도 없는 데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 일자리를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에 온 난민들은 우여곡절을 거쳐 전국의 공장을 전전한다. MAP 김영아 대표는 “난민은 돈 벌러 온 사람이라는 편견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난민은 돈을 벌 목적으로 한국에 온 존재가 아니다. 정착한 나라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일 뿐 여느 한국인들과 다르지 않다.

칼리드씨가 일하던 공장은 얼마 전 문을 닫았다. 수입은 샤이마씨의 파트타임 임금이 전부다. 부부는 여전히 기자를 꿈꾼다. 칼리드씨는 “난민 인정을 받았으니 지금보단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샤이마씨와 칼리드씨는 펜을 잡고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대한난민 루렌도(콩고 출신)

 

 
▲ 루렌도씨
 
 

회사 이름이 새겨진 작업복을 입은 루렌도(50)씨가 합판을 지고 날랐다. 한국어는 서툴지만, 그는 이제 직원들과 눈빛만으로도 척척 합이 맞는다. “인사도 잘하고, 루렌도씨 덕분에 기분 좋게 일해.” 동료들 사이에서 루렌도씨는 ‘싹싹하고 일 잘하는 직원’으로 통한다.

루렌도씨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태어나 앙골라에 살았다. 오랜 전쟁으로 앙골라인들은 자국 내 콩고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박해를 이어갔다. 여파는 루렌도씨 가정에도 닥쳤다. 한국을 찾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난민 신청을 했다고 판단한 한국 정부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300일 가까이 인천공항에서 노숙하던 루렌도씨는 2021년 비로소 난민 인정을 받았다.

 

“브로커에게 일을 구했는데, 일터가 너무 멀었어요.

가족들을 두고 일하러 가야 했어요.”

 

▲ 콩고 출신의 난민 인정자 루렌도는 경기도 안산의 한 가구 공장에서 일한다.

 

그 역시도 처음엔 브로커를 통해 일을 구했다. 브로커가 구해 준 일자리는 가족이 정착한 곳과는 멀리 떨어진 공장이었다. 난민들은 일을 하려면 가족과의 이별을 담보로 해야 한다. 현재 일하는 가구공장은 브로커가 아닌 외국인 센터에서 만난 아프리카 출신 동료에게 소개받았다. 가족이 사는 곳과 가까워서 더 이상 가족과 떨어지지 않아도 됐다. 루렌도는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변호사는 “E-9 비자*를 가진 이들은 산업인력공단을 통해 취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데, 난민들은 그런 통로가 없다”고 했다. 난민 대부분이 브로커를 찾거나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는 이유다.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난민 루렌도씨는 가구공장 일하며 한국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많은 난민이 ‘제2의 고향’ 한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민에게 취업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지인을 통해 안정적인 일자리 잡은 루렌도씨는 운이 좋은 경우다. 여전히 많은 난민이 한국 사람이 꺼리는 취약한 일자리로 내몰려 전국을 떠돌고 있다.

  *E-9 비자= 비전문 취업비자. 제조업, 건설업 등 단순노무직에 취업할 수 있다.

 

대한난민 저스틴(우간다 출신)

 

▲ 저스틴씨

 

14년이 지나 더는 흘릴 눈물도 없을 것 같았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 저스틴(58)씨에게 가장 길었던 하루. 저스틴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이 떨린다. 우간다 내전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은 반정부 모임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어디론가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날이 밝자 복면을 쓴 이들은 저스틴씨마저 잡아갔다. 영문도 모른 채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버려진 그는 한국에 연이 있던 목사의 도움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그를 기다린 건 차별이었다.

“학원 원장이 저보고 영국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라고 했어요.”

저스틴씨은 대한난민이 된 후 영어 강사로 일했다. 우간다는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그는 대학에서 초등교육 학위를 받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 영어 강사는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원에서 우간다인이 아니었다. 원장은 그를 영국인으로 속였다. 우간다 출신 강사에게 아이를 맡긴다는 사실을 부모들에게 말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조국에서 박해를 피해 온 그는 한국에서도 우간다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학원 원장은 미국 출신 강사를 채용하더니 곧바로 저스틴씨을 해고했다.

어른들도 인정하지 않는 강사를 학생들이 따를 리 없었다. 아이들은 그를 보곤 ‘고릴라’라고 놀렸다. 도저히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장에게 학생 지도를 요청했지만 ‘당신 일이니 알아서 하라’는 답만 돌아왔다. 국적조차 속여야 하는 무시와 차별 속에 강사 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저스틴씨에게 일자리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학원에서 잘린 그는 닭 가공 공장에 취업했다. 한평생 교편을 잡았던 그에게 공장은 너무도 생소했다. 생존을 위해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산재로 손가락 봉합 수술을 받은 저스틴은 재활을 위해 일주일에도 몇 번씩 병원을 찾는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래도 버텼어요. 일단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일은 익숙지 않은데, 근로 시간은 너무 길었다. 오전 의무 근로 1시간, 잔업 1시간을 추가 수당 없이 일해야 했다. 그가 더 받았어야 하는 추가 수당은 한 달 월세에 달하는 60만 원이었다.

결국 사고가 났다. 고장 난 갈고리가 화근이었다. 갈고리에 닭을 걸다 장갑이 레일에 끼어 손가락까지 빨려들었다. 간신히 손을 뺐지만, 손가락 일부가 잘렸다. 다행히 공장 관계자가 그의 손가락을 찾아내, 봉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 한 번 갈 때마다 8만 원을 내야 해서

망설여져요.”

 

잘려나간 손가락을 이어 붙이긴 했지만, 움직임은 예전 같지 않다.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나 둘 셋 넷….’ 저스틴이 숫자를 세어가며 수술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렇게 30여 분. 이날 하루 그는 병원비 8만 원을 지출했다.

사고 이후 일하지 못하는 저스틴씨는 병원비가 부담이다.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오는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가 일하던 공장에선 수술비와 소정의 치료비를 제공했지만, 이후 추가적인 치료와 재활은 오롯이 저스틴씨의 몫이다. 아들과 함께 사는 저스틴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중년의 아프리카 출신인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구직부터 일터에서의 차별, 해고, 그리고 산재까지. 난민 인정을 받은 이후 맨몸으로 노동 시장에 던져진 대한난민이 마주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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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8-0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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