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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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청계리 교우촌 여인들의 베짜는 모습 생동감 넘치게 포착

[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8. 베짜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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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베짜는 여성’,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5월 유서 깊은 청계리 교우촌 방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에 자리한 유서 깊은 교우촌을 1911년 5월 방문했다. 이곳은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자란 곳이다. 황해도는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고광성은 평산 출신이고, 황 포수는 봉산 출신이다.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고 바르바라와 고 막달레나는 재령 사람이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고순이는 고광성의 딸이다. 하지만 황해도 땅에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1862년 세례를 받은 신천 출신 이덕보가 이의송과 함께 황해도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해 12개 고을 이상에 교우 40여 명과 예비신자 100여 명이 생겨났다. 2년 후인 1865년 12월에는 4개 공소에서 800여 명의 성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시기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열일곱 세대 교우가 거주하던 청계리 교우촌을 방문해 성사를 집전했다. 안타깝게도 청계리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로 교우들이 순교하면서 폐쇄됐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해주에서 이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한 안태훈(베드로)이 세례를 받고 전교를 하면서 교우촌이 되살아났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황해도 청계리 교우촌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다. “1866년 가공할 박해는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열심이 지나친 신자 몇몇이 부군나무 가지를 잘라냈는데 이 사건은 신자들이 마을에서 쫓겨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일부는 체포되어 해주로 압송되었다가 나중에 돈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외교인들이 마을을 장악하고 추방된 신자들의 재산을 차지해 버린 뒤였다. 청계동은 다시 외교인 세상이 되고 말았다. 신자들은 모임 때마다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준 십자가를 어느 집 돌담 밑에다 감추어 두고 마을을 떠났다. 훗날, 청계동에 그리스도교가 되살아났을 때 그 십자가가 빌렘 신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빌렘 신부는 십자가가 숨겨진 바로 그 지점의 돌담을 허물고 문을 내게 했던 것이다.”(390쪽)

베버 총아빠스는 산골짜기에 자리한 청계리를 독일 티롤의 작은 마을로 비유했다. 그는 이곳에서 카시아노 신부와 함께 주민들에게 환등기로 시사회를 열었고, 필름 현상 암실을 꾸며 카메라 셔터가 망가질 정도로 한국인의 풍속 사진을 찍었다. 주민들이 거의 모든 생필품을 자급자족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촬영 소재가 됐다. “우리는 청계동을 집 삼아 한동안 머물 채비를 했다. 플라치도 신부는 암실을 맡았고 나는 그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이곳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널렸다. 이 외딴 마을은 생필품을 거의 자급자족한다. 나는 여기서 백성들의 일상과 전통 수공업을 세심히 살폈고, 뵈는 것마다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14쪽)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물레질하는 여성’,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마당 장독대 옆에서 물레질하는 여인 촬영

이번 호에는 베버 총아빠스가 청계리 여인들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을 소개한다. 화학 섬유가 나오기 전 우리 민족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에나 사용할 수 있는 면직물로 만든 옷을 즐겨 입었다. 이 면포를 일반적으로 ‘무명’ 또는 ‘미영’이라 불렀다. 그리고 잿물에 삶아 하얗게 바랜 것을 ‘백목면’, 천연 갈색을 띤 무명을 ‘황목’이라 했다. 무명은 남자들의 겹바지, 솜을 넣은 저고리 조끼 두루마기 적삼과 여인들의 치마저고리 적삼 속바지 옷감으로 쓰였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로 안감을 대 무명옷을 입기도 했다.

“무명천이다. 백성들은 평상시에 거의 무명옷만 입는다. 이 면직물 문화의 역사는 비교적 짧아서 1592년부터 1597년까지 일본이 부산을 기점으로 북서로는 평양, 동으로는 원산까지 온 한반도를 유린할 무렵 이 땅에 유입되었다. 말하자면 작은 목화씨 몇 알이 침탈된 민족에게 준 유일한 보상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씨앗이 남긴 이익은 풍요로웠다. 목화는 한반도에 급속히 전파되었고 그때까지 입던 옷감을 대체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16~478쪽) 안타깝게도 베버 총아빠스는 목화가 고려말 문익점(1329~1398년)이 원나라에서 들여왔음에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무명포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길쌈을 해 실을 꼬아야 한다. 그 도구가 물레다. 물레질은 여인의 일이었다. 물레로 실을 만들 때는 섬유 다발을 손끝으로 꼬아 실 끝을 내어 가락에 고정한 후 왼손으로 섬유 다발을 들고 오른손으로 물레바퀴를 시계방향으로 돌리면서 가락을 같이 회전시킨다. 이때 왼손을 위로 올리면서 섬유를 풀어주면 가락의 회전으로 섬유가 합쳐지면서 꼬임이 주어져 실이 만들어진다.

베버 총아빠스는 청계리 한 집 마당에서 물레질하는 여인을 촬영했다.<사진 1> 볕이 잘 드는 장독대 옆에서 무명옷을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물레질을 한다. 왼손에는 섬유 다발을 들고,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리고 있다. 물레질에 익숙한 듯 여인의 표정이 여유롭다.

물레질이 끝나면 날실에 풀을 먹이는 베매기를 한다. 베매기한 풀이 마르면서 날실이 빳빳해져 베짜기가 수월해진다. “바디를 달아 놓은 대에는 이미 실뭉치가 두껍게 감겼다. 무거운 돌 하나가 길고 가지런한 실들을 팽팽하게 당겨 준다. 실꾸리는 이 돌 위에 매달려 있다. 본격적인 베짜기는 바로 이 나무 실패 앞에서 이루어진다. 한 여인이 옆에 둔 풀 그릇에서 거친 솔을 꺼내 들고 실에 밥풀을 먹이면 실은 베짜기에 적당한 강도를 유지한다. 그러면 다른 여인은 실 사이로 넓적한 빗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실을 정연하게 분리시킨다. 풀 먹이는 자리 아래에는 숯불을 피워 실을 재빨리 말린 후 실패를 돌린다. 베짜기는 이런 순서로 반복된다. 실이 마르고 바딧대를 돌리는 동안 두 여인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병아리 몇 마리가 풀 그릇에 폴짝 뛰어올라 달콤한 밥풀을 쪼아 먹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15~416쪽)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베매는 두 여성’,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풀 먹이는 베매기와 베짜는 모습 잘 담아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베매는 두 여성’<사진 2>은 생동감이 넘친다. 우리나라 전통 두레 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베매기 장면을 정말 잘 담았다. 두 여인뿐 아니라 주변의 아이들 모습이 정겹다. 까까머리 소년과 무명 저고리를 입은 소녀들이 순박하다. 렌즈 조리개를 많이 개방해 풀칠하는 여인에게만 초점이 잡힌 것이 못내 아쉽다.

베틀은 명주·삼베·무명·모시 등 전통 직물을 짜는 직기다. 우리나라 전통 베틀은 베를 짤 때 기대를 설치해 조립하고, 베를 짜지 않을 때는 해체해 보관할 수 있어 ‘베틀을 차린다’ ‘베틀을 놓는다’라고 한다.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도 “베를 짤 줄 아는 몇몇 마을 여인들이 자기 베틀을 들고 이집저집을 다니며 베를 짠다”고 소개했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베짜는 여성’의 사진은 서사적이고 장엄하다.<사진 3>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쪽 발에만 무게 중심을 지탱하고 양손과 한 발로 베틀을 조작하는 여인의 모습은 숭고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는 아낙네들과 소녀들 역시 베짜는 여인과 동질감을 드러낸다. 가정 안에서 여인의 고단한 일상은 숙명이 아니라 희생이다. 베짜는 일은 고된 노동이다. 그럼에도 베를 짜는 것을 여인의 덕으로 여겼다. 집안에서 책 읽는 소리와 베짜는 소리가 들리면 그 집안은 흥한다는 말도 있었다. “몸에 한 벌의 누더기를 입더라도 항상 베짜는 여인의 노고를 생각하고, 하루 세끼의 밥을 먹을 때마다 매양 농부의 고생스러움을 생각하라”는 「명심보감」의 가르침처럼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헤아릴 수 없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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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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