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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4주일 -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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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택 주교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태어나신 분이시기에, 거리감이 느껴지시나요? 혹 그분이 이곳 우리가 사는 한국 땅이 아니라 저 먼 중동의 팔레스티나에 사셨던 분이라 멀게 느껴지시나요? 혹시라도 그분이 지금 이 땅에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면,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까요? 꼭 그렇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동향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요.

예수님은 공생활, 아마도 초기 즈음에 카파르나움에서 중풍 병자도 고쳐 주시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서 마귀들도 쫓아내시고, 야이로의 딸도 살리시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신 후 잠시 고향 나자렛에 돌아가셔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십니다. 회당은 사제들이 제사를 드리는 성전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성경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도 하고 거룩한 가르침도 듣는 일종의 ‘(마을)회관’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두루마리를 읽으시고(루카 4,17) 권위를 갖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동향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의 깊은 가르침을 듣기보다는,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하며 놀라는 데 그칩니다. 왜냐하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며 선입관으로 그분을 규정하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 어머니도 동네 사람이고, ‘예수님의 형제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한 겁니다.(물론 근동의 ‘형제’라는 단어는 한 어머니에서 난 한배 형제들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일가친척과 친족까지 다 ‘형제’로 지칭합니다.) 우리 자신의 아집에 갇혀 있으면, 우리가 아는 피상적인 앎이 참된 믿음에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오늘 1독서에서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깊은 믿음에로 넘어가기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오늘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힌트를 줍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힘(그것이 외형적 힘이나 사회적 파워 혹은 물질적 풍요의 힘이건 간에)만 믿고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하게’ 하느님께 맞서지 않고, 하느님 자비에 깊이 의탁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의 약함과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한 번씩 찾아오는 시련과 힘든 십자가들은 ‘뻔뻔해지기 쉽고 완고해지기 쉬운’ 우리를 하느님 앞에 무너뜨리며,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게 만드는 하느님의 초대요, 개입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정순택 주교(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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