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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221) 불편함과 부지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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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수도원, 주일 아침 식단은 두 종류입니다. 한편에는 라면에 식은 밥과 김치, 다른 한편에는 구운 식빵에 치즈, 야채, 삶은 계란과 우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 아침 식사 후 설거지 양은 꽤 많은 편입니다. 보통 평일이면 단지 식판과 국그릇인데, 주일 아침에는 대부분의 수사님들이 라면도 먹고, 빵도 먹다보니 아무래도 사용한 그릇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사제 서품식이 있기 전 날 아침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서품식 전례 예식 준비로 꽤 분주하였습니다. 바쁜 일정이 있는 수사님들부터 아침 식사를 끝내고 맡은 준비를 하러 자리를 떴습니다. 그래서 서품 행사 준비를 맡지 않은 몇몇 형제들이 남아 아침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좀 불편한 수사님, 서품 예절을 맡지 않는 수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래, 원래 내가 하려고 했는데 뭘!’ 하면서, 고무장갑 끼고, 한 손에는 수세미를 잡고,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 날따라 행사 준비로 지방에서 생활하는 수사님들도 본원에 와서 함께 식사를 했기에, 식기 양은 평소 주일 보다 더 많이 세척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할 식기 숫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 날,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랬는지 온수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설거지 하는데 따스한, 아니 미지근한 물조차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분은 최전방 군 생활 할 때나 느꼈던 것인데…. 예상대로 식기에 묻은 기름기는 아무리 잘 문질러도 깨끗하게 잘 씻겨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거지 할 때의 마음은 바뀌어 ‘왜 하필이면 오늘 온수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이 고생을 하나!’ 했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형제는 고무장갑도 끼지 않는 손으로 묵묵히 헹굼질을 하였습니다. 간혹 그릇에 묻은 기름기가 잘 지워지지 않으면, 미소를 띠며 그것을 내게 다시 건네며 ‘괜찮으시면 한 번 더 수세미로 씻어 주시겠어요?’ 또한 마른행주질 하는 형제는 평소보다 더 깨끗이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암튼 평소 설거지보다 더 힘이 들었고, 그 많은 식기를 빡빡 문질렀더니 엄지손가락과 어깨, 팔 근육마저 아팠습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는 것이, 형제들은 가벼운 대화에 미소를 띠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이 그들 역시 그날따라 설거지가 힘들고 손이 시렸답니다. 하지만 가벼운 불편함이 오히려 생각을 설거지와 따스한 대화에 집중하게 되어 더 좋았답니다.

그렇습니다. 평소 미사 강론 때, 말로는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고 창조하신 세상, 늘 잘 가꾸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따스한 물과 따뜻한 공간이 익숙한 내 자신을 봅니다. 지구의 자원은 고갈되어 가는 걸 알면서도 편안하고 익숙한 생활 습관에 젖어 설거지할 때 따스한 물 한 번 안 나왔다고, 혼자 툴툴거리는 나를 봅니다. 따스한 물이 안 나와 불편했지만, 좀 더 부지런하면 별 문제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말로 ‘환경과 생태’ 문제에 천 번, 만 번 신경 쓰기보다, 자신에게 배여있는 편안함과 익숙함을 간혹 거부해 보면서, ‘불편함과 부지런함’과 친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귀하게 여기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궁시렁 거리며 설거지하다가 깨달은 짧은 묵상입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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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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