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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몸과 피, 의심하느냐

[미카엘의 순례일기 (3)볼세나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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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포 소성당에 모셔진 피 묻은 성체포.



전 세계적인 슬로우 시티(Slow City) 운동의 발상지이자, 중세 영화들의 촬영지로 유명한 이탈리아 오르비에토는 해발 195m 위에 세워진 요새 도시입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지요. 푸니쿨라(경사를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시 중턱에 올라 주교좌 성당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경험 또한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작고 소박한 골목을 돌다 보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중앙광장이 나오는데, 그 광장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서 있습니다.

13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베드로라는 신부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는데, 고민의 한가운데에는 미사 중 변화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대한 의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작고 동그란 밀떡과 검붉은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평범한 음식이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심을 하고서 올바른 사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신부님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 순례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성인의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길 간구했는데도 여전히 성체의 거룩한 신비에 대한 의심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순례에 큰 기대를 걸었던 그는 크게 상심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로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볼세나에는 성녀 크리스티나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열 명 남짓 둘러앉아 전례를 행할 수 있는 작은 경당이 있는데, 베드로 신부님도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누룩 없이 만들어진 흰색 제병을 축성했습니다. 그리고 거양성체를 하는 순간, 갑자기 성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피는 베드로 신부님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려 그 밑의 성체포까지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당시는 프랑스 트루아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교황의 자리까지 오른 우르바노 4세의 시대였는데, 교황님은 마침 로마에서 전쟁이 일어난 탓에 볼세나 근처의 비테르보라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주교님을 통해 이 놀라운 기적 이야기를 듣게 된 우르바노 4세 교황은 곧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이 사건이 분명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290년에 사람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성체포를 보관하고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으며, 300년 후 그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밀리오 그레코가 만든 성당 정면의 청동문, 브리지초 경당 천장에 그려진 루카 시뇨렐리의 ‘최후의 심판’ 등 수많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도 많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믿고 그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지를 묵상하는 일이 더 중요하겠지요. 주님의 피로 적셔진 베드로 신부의 성체포는, 7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적의 ‘성체포 소성당(Cappella Coroporale)’에 모셔져 있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 신부님과 이곳 성체포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볼세나의 기적에 관해 설명할 때부터 신부님께서는 이미 표정이 어두우셨습니다. 성당을 향해 걸으며 모두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때에도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고 말씀이 선포된 후, 강론대에 오른 신부님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이나 서 있기만 하셨습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신부님께서 입을 떼셨습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시작된, 매우 짧은 강론이었습니다.

“저 역시 베드로 신부님과 같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은경축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얼마나 의심하면서 살았는지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신부님의 눈물과 신자들의 흐느낌이,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처럼 작은 경당 안에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부족한 사제가 열심한 신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끝없이 흘러내린 눈물로 가득했던 그 날의 미사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몸과 피를 저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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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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