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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지혜는 ‘연약함’에서 기인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1. 삼위일체와 연약함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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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장면을 묘사한 이콘.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아버지의 이토록 합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말씀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계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은 마리아의 태중으로부터 우리의 인간성과 연약성의 실제 육(肉)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시면서도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몸소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4-5).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모양으로 말한다. 곧 단순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말씀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분은 여성인 이 거룩한 사람 안에서 육체를 취하셔야 했다.

여자의 몸이 악마라고 믿는 카타리파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이다. 이단 중 하나인 카타리파에 의하면 여성의 육체에 의해 아담이 꾐에 넘어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여성의 몸이 모든 인간의 육신을 낳기에 육신 자체가 모두 악이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항상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대해서 말한다. 그 태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취한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조건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죄인들, 성인들, 가톨릭 신자들, 이교인들, 모든 민족, 모든 남녀)이 지닌 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 조건을 취하신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어떻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취하신 그릇이다. 모든 민족과 문화, 심지어는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민족도, 병자도, 무식한 사람도, 죄인도 같은 그릇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도 이런 우리의 약함을 취하셨다. 그분은 성장하셔야 했고, 음식을 받아드셔야 했으며, 말하고 걷는 법까지도 배우셔야 했다. 그분은 단 한 번에 이 모든 것을 습득하신 것이 아니라, 여느 인간들처럼 실패와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이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배우셔야 했다. 모든 것을 가지셨던 분이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십자가가 당신의 것인 양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에 매달려 혹독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모든 것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같이 살기를 택하신 것이다. 약하게 되어야 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필연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지혜는 연약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각 위의 연약함으로 인해 서로에게로 흘러들어가고 흘러들어오는 사랑의 영원한 흐름을 통한 완전한 일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고, 이 연약함이 역설적으로 지고의 완전한 사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율권과 자기 충족을 원하며 자신이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이길 원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참된 존재성은 세 위의 관계성 안에서 서로를 나누고 보충하는 가운데 드러나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존재의 본질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약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 충족을 지니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이 기인하는 것이 세 위의 상호 관계성이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암이라 불리는 형제’에 나오는 밥 스튜어트 신부의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어 보겠다. 암 형제는 동정심(compassion)을 배우도록 나를 초대하였다.

“나는 번호가 적혀있는 병원 카드를 받았다. 나와 다른 환자들은 매일 아침 각기 자기들에게 맞는 과에 들어가기에 앞서 접수창구에 이 카드를 제시했다. 전에도 나는 자주 병원을 드나들었었다. 그러나 전에는 환자 방문을 위해, 사목적 봉사를 위해, 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 들어갔었지만, 이제는 수백 명의 암 환자들 가운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들어갔다.

어쨌든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 치유가 필요해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암 환자이고 우리 육체를 강탈하는 질병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놀랐다. 우리가 비록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우리는 우리의 암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암의 확산 정도, 치료법, 예후, 그리고 고통뿐만 아니라, 어려움, 두려움과 희망 등을 나누었다. 여기서 나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통과의 일치를 체험했다. 매일 아침 암연구소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나환우가 되었다. 치유자나 사목자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과거나 체험은 다양했지만 우리는 뭔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을 암 형제가 나에게 자매와 형제로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아마 난생처음으로, 나는 나환우로서 프란치스코가 그의 유언에서 회고하는 체험을 제대로 식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 데려가셨고 … 나에게 있어 쓰고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림2]]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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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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