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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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생명에 기원 둔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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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찬가’를 통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생명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서로 연결돼 있다고 가르친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아이들에게 자연 생태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다. 【CNS】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⑦창조된 세상 안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생태 영성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생겨 나온다는 인식은 프란치스코를 지금까지보다 더 큰 애정으로 가득 채웠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미한 피조물까지도 그들이 그와 똑같은 기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자매라고 불렀다.”(「보나벤투라에 의한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 6항)

앞서 말씀드렸던 ‘존재의 위대한 사슬’이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매우 프란치스칸적 색채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인간의 영성과 지혜가 인식하고 있었던 바이다. 어쩌면 프란치스코는 이런 자연스러운 진리를 좀 더 강하게 느꼈던 사람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도 모든 존재, 특히 다른 인간들과의 이런 연결고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이것을 감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삼위일체적 본질을 당신 모상과 더불어 부여해주셨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피조물들은 이런 자연적 본질을 참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을 뿐이고, 매우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느님의 자유 의지와 같은 의지의 자유라는 엄청난 선물이 주어진 인간들은 이 선물이 매우 부정적인 측면에서 반대로 작용하여 존재의 연결고리가 아닌 ‘나’와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단절을 살아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 찬미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의 노래(혹은 태양의 찬가)’를 통해 노래하고자 했던 것은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그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었다. 실제로 다른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과 그 생명력에 기원을 두고 있는 다른 모든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인지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충만하게 찬미할 수 있다.

‘종달새’는 그가 ‘종달새’로 불리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에 전혀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생명)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이들은 우리 인간의 말로 그 찬미를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게 창조된 생태계 안에서의 자신들의 연결고리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 위대한 찬가요 시인 프란치스코의 ‘피조물의 노래’는 그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의 존재 자체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찬가가 위대한 이유는 그 모든 피조물이 연결된 고리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자각시키면서 우리를 그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주적 춤에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 행복의 원천인 관계성 깨달아야

산업혁명 이후, 특히 20세기의 급격한 현대주의를 거치면서 우리는 생태계의 위기와 기후변화의 위기를 우리 역사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겪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급박하고 심각하게 자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창조된 세계 일부라는 것이고, 피조물 중 하나요,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찬미받으소서」 제1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이 공동의 집이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십니다.”

지금 이런 위기의 때에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 역시도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엄연하고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분명히 우리에게 불편한 것들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 불편한 진리 안에 깊숙이 들어있는 궁극적 행복의 원천인 관계성으로 들어서는 행운도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여러 프란치스칸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낸 결론에 의하면 프란치스칸 운동의 고귀성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한다. 이는 모든 인간 존재가 사회적 신분이나 피부색, 문화, 종교 등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됨 없이 모두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이 가치가 인간에게만 그치지 않고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도 포함하는 관계성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와 ‘우리’라는 집단을 넘어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어떤 피조물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 존재를 받아들이고, 선입견이 없이 살아가며, 사랑으로 인해 구원의 차원에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이 발자취는 우리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서기 위해 동정녀의 태중으로 내려오신 것이 바로 그분의 발자취이다. 그분은 바로 구유 속에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이시고 여행 중에 가난하셨던 예수님이시며, 사랑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이 세상의 조건 모두에 내맡기실 만큼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이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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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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