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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깃든 하느님

[사유하는 커피] (50·끝)유비쿼터스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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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장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모든 곳에 있는 것은 자칫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숨 쉬며 살아가는 공기처럼 우리의 감각이나 관념이 굳이 존재 여부를 따지지 않는 까닭이다.

경계(interface)에서 신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공기가 줄어들수록 공기에 대한 갈망이 극한에 달하면서, 비로소 존재를 감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실에 이르는 길에는 경계가 있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레테의 강’이 그와 같은 경계요, 선승(禪僧)에게는 해탈의 순간이 경계와 다름이 없다. 경계에서 꽃이 피는 것인지, 꽃이 피므로 경계인지에 대한 문학적인 사유는 종교적으로도 끝 모를 여운을 만들어 준다.

하느님에게 경계는 없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잔의 커피에도 신은 존재한다. 오지 산간에 있던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커피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데에는 커피 전문가 돈 홀리(Don Holly)의 감동이 한몫했다. 그는 2006년 최고의 커피를 뽑는 대회장에서 게이샤를 맛보고는 “컵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I saw the face of God in a cup)”고 고백했다. 곁에 있던 인텔리젠시아의 제프 와츠(Geoff Watts)는 “커피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좋은 커피에는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맛’으로 신이 깃든다.

1000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 커피는 ‘어머니의 눈물’이라고 불린다. 100만 명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간 1994년 내전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들은 자녀를 키워내야 하는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극심한 가난에서 이들을 구해낸 것은 세계 각국에서 원조로 보내준 커피나무였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어머니들은 그야말로 눈물로 커피나무를 일궈냈다. 커피는 이들에게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나 아이들을 교육함으로써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을 선사했다.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준 커피는 르완다 여인들에게는 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커피를 두고 ‘이슬람의 음료’라는 말이 많은데, 기원을 더듬어보면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의 음료’에 더 가깝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묘사되다시피, 베두인에게 졸음을 이겨내는 것은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오아시스가 멀리 떨어진 구간을 가려면 베두인은 밤에 이동해야 한다. 무리를 지어 낙타나 말을 타고, 또는 걸어 밤길을 가다가 잠이 들었다가는 목숨을 잃게 된다. 해가 떠오르면 사막에는 숨을 곳이 없어 오아시스에 도달하기 전에 탈진한다. 이 때문에 베두인들은 커피를 찾았으며 곱게 가루를 내 최대한 진하게 추출해 마셨다. 진할수록 잠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됐다. 이런 추출법은 16세기 터키의 제즈베로 이어졌다. 베두인은 커피에 잠을 쫓아주는 ‘신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때론 커피 자체보다는 그 결과물에서 신의 자취가 감지된다. 종교음악의 아버지로 엄숙한 음악만을 작곡했던 바흐는 커피를 만난 뒤 ‘커피 칸타타’라는 가벼운 코미디풍 음악을 만들어 대중을 기쁘게 했다. 60알의 원두를 까다롭게 선별해 마신 베토벤은 끝내 인류애를 상징하는 교향곡 ‘합창’을 토해냈으며, 시계처럼 정확하게 매일 아침 디카페인 커피를 즐긴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비밀을 풀 실마리를 찾아냈다. 일련의 이들 사건에서 커피에 스며든 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과장일까?

필자는 커피를 사랑하므로 커피에서 신을 느낀다. 누구나 관심을 갖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를 스쳐 가는 분이 아니라 항상 그곳에 있는(being) 분이기 때문이다.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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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유하는 커피’를 연재해 주신 박영순 회장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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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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