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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니까요

[미카엘의 순례 일기] (27)하느님, 형제,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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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순례단.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를 딱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물론 주저 없이 ‘주님의 기도’를 맨 처음에 꼽게 될 것입니다. 루카 복음 11장에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단순히 ‘아버지’라고 표현합니다. 같은 기도문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6,9-13)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유다인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비춰보면, 루카 복음사가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호칭을 사용하여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약성경 중 무려 170여 곳에서 등장하는 이 ‘아버지’라는 단어를, 동시대인들은 아마도 불경스럽고 충격적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아버지’라는 단어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두가 평등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우리는 서로의 직업이나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마음으로 서로를 형제, 자매로 대하고 있는 걸까요?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 업무 종사자들이 섞여 있는 한 가톨릭 병원 사목회의 순례를 함께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직업의 자부심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겸손함을 동시에 가진 분들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 서로 가까이 지내는 사이인데도 어쩐지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미묘한 느낌을 말씀드릴 기회가 생겨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한 분께서 의사 선생님, 특히 교수님들과 식사하는 것은 처음이고 의사들과 다른 직원들의 식당은 아주 분리되어 있다고 답해주셨습니다. 곁에 계신 의사 한 분도 조금 계면쩍어하시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는 것은 병원의 구조상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부원장을 맡고 계신 신부님께서도 “직원들이 나를 대할 때, 사제로서가 아니라 병원 운영자로서 보는 것을 느낀다”고 말씀하셨고요.

다음 날은 오전 내내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었고, 마침 그날의 복음이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저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와 교회 전통 안의 형제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 가지 제안을 드렸습니다.

“순례 때만이라도 서로 형제, 자매로 부르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순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른 이들에 비해 뛰어나거나 큰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듯, 자신이 가진 직위와 사회적 위상을 내려놓고 형제애를 되새길 수 있는 작은 방법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마이크를 건네받으시고는, 지난 세월 사제로 살아오면서 당신의 개인적인 능력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맡은 직분 때문이었다고 운을 떼셨습니다.

“하지만 저도 하느님 앞에서는 여러분과 똑같은 형제입니다. 이번에는 저 또한 똑같이 형제님으로 불러주세요. 미사를 집전할 수 있을 뿐, 저 역시 하느님의 자녀이며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그러자 모두 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기쁜 마음으로 화답해주셨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몹시 어색했습니다. 아무리 ‘프란치스코 형제님’하고 불러도 신부님은 알아듣지 못하셨고, 어린 원무과 직원 자매님께서는 의사 선생님께 ‘교수님… 아니 가브리엘 형제님…’ 하며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한참이나 어린 인사과 직원에게 헬레나 자매님이 맞느냐고 이름을 몰라 미안해하시는 병원장님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지만, 병원이 지닌 견고한 체계 속에서 이런 호칭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순례가 끝난 후 두어 달쯤 지난 뒤 신부님의 초대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저는 그때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렸습니다. 순례 후 병원장에서 은퇴하신 형제님께서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 적어도 사목회에서만큼은 서로 형제자매로 부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래도 그 일을 계기로 나이와 직위를 떠나 모두 같은 하느님의 자녀임을 늘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당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릅니다. 그러나 성당 바깥을 나서는 순간, 또다시 세속의 옷을 입고 세상이 정해준 이름표를 다시 꺼내 왼쪽 가슴께에 달아버립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형제로, 또 자매로 부르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10, 34ㄴ-35)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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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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