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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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안에 놓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3.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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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칸 영성의 초점은 주님과 그분의 완전한 선과 사랑에 맞춰져 있다. 조토,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성인’,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12.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하느님 현존 의식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관점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것에 있어서도 소유자가 아니다. 오직 주님만이 소유자이시고 임자이시다. 우리가 정말로 그분의 전적인 사랑에 신뢰심을 갖고, 그분의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함께 산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이런 곳에는 원수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콜로 2,6-7)

주님께서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를 통해 프란치스코에게 당부하였던 이 ‘집의 수리’는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그분의 선물과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빈곤함과 약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을 두고 그 생명을 사랑하며 감사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대로 프란치스칸 영성의 초점은 우리 자신, 혹은 우리가 하는 일에 맞춰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약함 혹은 그 약함을 모조리 씻어버리는 것에 맞춰지는 것도 아니다. 주님과 그분의 완전한 선과 사랑에 맞춰지는 것이고, 그분께서 이 완전한 선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과 지금도 베풀어 주시고 있는 은총에 맞춰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클라라 역시도 이 선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클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쓰라림도 우울함도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안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안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하느님 본질의 형상 안에 두고 관상을 통하여 그대 자신 전부를 그분 신성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십시오.”(11-13) 클라라가 여기서 말하는 ‘영원의 거울’이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아녜스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거울을 바라봄에 대해서 말한다. “그분은 영원한 ‘영광의 광채이시고’ ‘영원한 빛의 광채며 티 없는 거울이십니다’. 오! 여왕이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시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계속해서 그 안에서 당신 얼굴을 살펴보십시오. 그리하여 갖가지 장식으로 휘감고 차려입어 안팎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의 딸이요 사랑스러운 정배에게 어울리는 온갖 덕행의 꽃과 옷으로도 치장하십시오. 사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대가 거울 전체에서 관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거울 안에는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찬란히 빛납니다.”(14-18)

이 네 번째 편지에서 클라라는 아녜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육화와 수난과 죽음을 마음속 깊이 새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바라봄에 한 가지 궁극적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 바라봄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그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를 좀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그분이 우리 집을 차지하시게 하고 우리가 그분 소유가 되게끔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상(觀想)이라는 말에는 볼 관(觀)자와 생각할 상(想)자가 들어가는데, 이 한자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해보면 여기에는 서로의 바라봄을 통한 ‘하나 됨’이 궁극적으로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상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나’와 ‘그 상대’의 마음을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이 우리 존재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내가 바라보는 상대와 마음을 서로 나눈다는 것은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생각할 상(想)자를 풀이해보면 서로의 마음이 함께한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상의 현상을 실질적인 측면에서 숙고해본다면 우리가 먼저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라봄을 통해 그분이 먼저 극진한 사랑과 선으로 우리를 바라봐주고 계심을 인식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분의 이 사랑 가득한 시선은 이를 인식하는 존재를 그 사랑으로 이끌어 들여 그 사랑과 하나 되게 해 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 시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바라봄을 통해 성녀 클라라가 그랬듯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거울이 되어 주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2,5)라는 권고를 이런 맥락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왜 클라라는 십자가를 바라봄을 말하면서 거울이라는 상징을 쓰고 있는 것일까? 알다시피 거울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울로 비유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과 자신을 동시에 바라보게끔 초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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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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