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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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복음적 대안을 ‘거울 영성’으로 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5.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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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 성녀는 봉쇄의 삶을 산 수도자이지만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대안을 ‘거울 영성’으로 살았고, 지금도 우리 모두를 이 거울 영성의 복음적이고 대안적인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사진은 클라라 성녀가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했던 산 다미아노 성당 공동 숙소.

 

 


12.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하느님 현존 의식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관점

하느님께서는 서양 문명이 합리성과 기능성, 소비문화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전쟁의 상황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던 때에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그 당시의 세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800년 이상을 지속해 온 이런 지배적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비평을 내놓았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의 체제(당시의 사회와 교회 모두)와 직접적으로 투쟁하고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한 거울의 이미지가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였다. 그가 모범으로 보여준 사고와 행동 방식은 나쁜 것에 대한 최선의 비평은 더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거울의 이미지는 그 거울을 바라보는 이의 본래의 온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전체에 연결된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지금의 흐트러진 모습도 함께 보여주어 본래 모습을 회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클라라 성녀가 거울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존재는 이 거울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하느님과 서로에게 연결되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비추어 준다.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창조된 존재의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 쓰신 첫 번째 책이 바로 창조된 세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2020년에 귀천한 오스트리아의 신학자 아돌프 홀(Adolf Holl)이 말하듯이, 프란치스코는 ‘성당의 탑에 시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에 출현했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셈을 하기 시작하던 때에 프란치스코는 셈을 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경제를 버리고 하느님께서 셈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거리낌 없이 내어주시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은총의 경제를 살았던 사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주도하에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때에 프란치스코는 실제로 “훨씬 더 좋은 길이 있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우리가 이 공동의 가정인 지구를 황폐하게 하는 생산과 소비의 문화를 시작하던 바로 그때 그는 이 땅을 사랑하며 그곳에서 맨발로 단순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것과 우리에게 확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결국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최고의 매력을 지닌 실천가였다. 그리고 그는 에고(가짜 자아)를 내려놓을 때 오는 ‘참된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클라라는 비록 봉쇄의 삶의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의 이 복음적 대안을 ‘거울 영성’으로 살았고, 지금도 우리 모두를 이 거울 영성의 복음적이고 대안적인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클라라 성녀의 ‘거울 영성’은 앞서 나누었던 ‘바라봄의 영성’이 좀 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거울이라는 것은 먼저 대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그 대상의 이미지를 진실하게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경심을 갖고 바라볼 때, 즉 언뜻 보이는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의 가치를 내면의 눈을 통해 다시 심오하게 바라볼(re-spicere: respect) 때 거울 역할을 하는 모든 존재는 우리의 그런 존경심 어린 존재성을 비추어 주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이런 비추어봄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3,18)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서로를 이렇듯 겸허하고 존경심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서로를 비추어 줌으로써 완전한 사랑의 관계성을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내면 깊숙한 곳에 이런 삼위일체의 자취를 심어주셨다는 것이 성 보나벤투라의 주장이다.

이렇듯이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비추어 주는 삶의 여정을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존경심을 갖고 상대를 거울을 보듯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존재로부터 ‘나’의 지극히 아름답고 통합된 삼위일체적 본질을 비춰볼 수 있게 된다. 클라라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상을 통해 이런 수양에 정진할 것을 프라하의 아녜스와 더불어 우리 모두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십자가를 존경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먼저 그런 사랑과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우리가 아니라 결국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존경 가득한 시선과 그 시선을 통해 오는 은총을 깨닫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 시선이 그분의 시선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당신 사랑 안으로 완성해 가시는 모든 존재를 바라본다면 그 모든 존재가 우리의 참 자아, 아름다운 자아, 하느님 모상인 우리의 참모습을 비추어 주게 되어 있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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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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