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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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불의까지도 하느님 선에 맡겨드려야 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7.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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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불완전함과 심지어는 불의까지도 끌어안아 이를 하느님 선의 힘에 맡겨드려야 할 때를 맞이하게 된다. 사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전범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12.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하느님 현존 의식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관점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불완전함과 심지어는 불의까지도 끌어안아 이를 하느님 선의 힘에 맡겨드려야 할 때를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성 보나벤투라나 다른 여러 사람(릴의 알란이나 쿠사의 니콜라스 등)이 강조하듯이, ‘반대들의 일치’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선한 힘이 더욱더 강력하게 현존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가장하는 참으로 어이없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인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런 우를 범한 적이 있으며, 이런 예들을 우리는 우리 역사 안에서 다분히 찾을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 전쟁과 학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선과 방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내전 등이 그런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과정 중에 많은 전범이 자신들의 무고를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대표적인 나치 학살자는 전쟁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이스라엘 비밀정보 요원들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15년간 피신해 살다 재판에 넘겨졌을 때 무고를 주장했다고 한다.

아이히만에 대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쓴 한나 아렌트는 그 책의 부제로 ‘악의 평범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우리 시야의 사각지대일지 모른다. 달리 말하면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거나 아예 악을 의로움으로 뒤집어 놓기까지 하는 현시대의 우리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한 말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 책의 소개 글에서 아모스 엘론은 이렇게 말한다. “나치 정권은 잘못된 악을 새로운 의로움의 토대로 세움으로써 법질서를 그 머리로부터 뒤집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뒤집힌 세상 안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저질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반면 이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많은 예가 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 선과 사랑을 보는 데 게으르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앞서 강조했듯이 우리가 선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우리 정신은 자연스럽게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불만족한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중 한 예를 들자면,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29세의 나이로 짧게 생애를 마친 에티 힐레숨(1914~1943)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형을 당하기 얼마 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즉 죽음의 현실이 분명하게 내 삶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 내가 죽음을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소위 말해 이 파멸의 순간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의 현실을 거부하는 데 내 에너지를 쏟지 않음으로써 내 삶은 거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죽음을 배제하고 잊게 될 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지만,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삶을 확장해가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사랑을 매일매일 풀어주어 그 사랑이 살아 움직이게 함으로써 전쟁과 전쟁이 만들어내는 온갖 비정상적이고 혐오스러운 것들과 싸울 수 있었다.…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충만한 선을 동원하여 다른 이들에게 자애와 친절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여는 유일한 길은 이런 잔혹한 순간에도 우리 가슴으로 그 사랑을 사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몹시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나는 하느님 당신의 그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평화의 넓은 영역을 되찾고 다시 구축하는 일이다. 더더욱 큰 평화를 말이다. 그리고 그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투사해주는 일이다. 우리 안에 평화가 더 있으면 있을수록 이 험난한 세상에도 더 큰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연결된 존재가 서로를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자취를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 그 내면 깊은 곳의 핵심을 보게 된다면 서로에게 하느님의 본성, 즉 선을 드러내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창조된 존재 전체 서로가 한 운명을 지닌 유기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혹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스러운 생명력으로 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지만, 유독 인간만은 이를 함께함의 삶과 그 삶에 있는 관계성 안에서의 질곡을 통해 이를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 때문이라고 한다면 역설이나 억측일까?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고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유로 사람은 선을 향해 나아가 모든 존재가 함께 사랑과 복을 나누며 하늘나라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은총을 버리고 선에서 악을 끄집어내 다른 존재들에게 투사하는 이원론적이고 비판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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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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