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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10. 땅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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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늦은 봄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우리 곁의 좋은 이웃인 솔아 아빠려니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저, …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단정한 음성이 낯설었다. 우리는 일제히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아는 신부님이었다. 입회 전 교리교사를 할 때 학생이었던 친구가 이제 인천교구의 신부님이 되어 찾아온 것이다. 마침 단짝 소꿉동무이자 수도생활의 도반인 선이 수녀가 함께 살고 있었기에 오랜만에 추억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다음에는 일손을 거들러 오겠다며 신부님은 돌아가셨다. 우리 집에 다녀가시는 분들 대부분이 돌아가실 때에는 ‘다음에 올 때는 일바지라도 가져와 일을 거들고 가겠다’고 다짐하시곤 하기 때문에 신부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별로 담아두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노동이 고되 보여서 말에라도 마음을 담아 힘이 되어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난히 가물었던 지난해 가을, 고구마를 캐며 마치 유물이나 보물을 캐는 모양으로 호미질해야 했는데, 봄에 다녀가신 그 신부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밭으로 와서 돌같이 딱딱한 흙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잠시 하다가 가려니 생각했는데, 우리가 쉬는 시간에도 혼자 밭으로 가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 어스름이 내려올 때까지도 묵묵히 삽질을 하였다. 노동이 끝난 후 밥상에 앉을 때, 나는 종종 우리의 식탁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장면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얼굴들, 손끝마다 물든 까만 때, 가릴 것 없는 목젖 웃음, 가뭄 속에서 여문 고구마의 달콤함. 그날도 우리 모두 식탁에 앉아 밭에서 난 먹거리들과 고구마를 먹으며, 소박하지만 충만한 식탁을 함께하였다. 문득 신부님의 손을 보니 곳곳에 물집이 잡혀있다. 안쓰럽지만 우리 모두 땅과 친해지기 위한 입문처럼 지나온 그 생채기를 덤덤하게 생각하며, 나는 “삽질 자주 하시면 물집이 없어지고 단단한 굳은살이 올라와요”라고 이야기했다. 신부님은 “네”라고 하시며 씩 웃으셨다.

이후로도 신부님은 시간이 될 때마다 우리의 노동에 함께해 주셨다. 마치 본래 당신의 일이었던 것처럼 마음을 다해 땅을 다스리고 들에 풀을 다스려주셨다. 신부님들이 예를 갖춰 입으시는 클러지 셔츠를 입고도 “이 옷이 제일 편해요”라며, 하얀 소금쩍이 고이도록 한마디 말없이 그저 묵묵히 땅을 대하는 모습이 그 자체로 땅처럼 다가왔다. 땅 같은 사람.

나도 내 자신이 정말 땅처럼 다가올 때가 있었다. 그것은 땅이 주는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라,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내 마음이었다. 9년 전, 말기 암으로 임종을 앞둔 수녀님과 이곳에서 함께 살았었다. 수녀님이 겪고 있는 그 아픔에 내가 아무것도 도와드릴 수 없다는 것이 죄송스러워서, 그때 내 자신이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땅의 상태처럼 다가왔었다. 이런 마음을 꼭꼭 접어 두고 있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수녀님이 내 손을 붙들고 “가르멜, 땅 같은 사람. 좀 더 오래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라고 마지막 인사를 해 주셨다. 그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 이름 없었던 땅에 이름을, 황무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축복해주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땅 같은 사람은, 세상의 높낮이 기준에 마음 두지 않고, 다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며 ‘땅에서, 사람 서리에서, 세상에서’ 묵묵히 따르는 그 사람이다. 문득 찾아와 내 일처럼 삽질하는 신부님이고, 한 작은 일도 복음 안에서 소중히 완성해가는 우리 모두이다.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조경자(마리 가르멜, 노틀담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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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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