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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42. 너를 위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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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파트를 나와 성당까지 이르는 담 옆을 걸었다. 바닥에 소복이 쌓여있는 꽃잎을 보니 분명 아카시아 꽃이었다. 담벼락 너머에 아카시아 나무들이 살고 있었는데 여태 몰라봤다는 것이 이상해서 나는 마스크를 내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아카시아 향내를 맡아보려 했다. 향이 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향을 꺼내보려 했으나 꽃에서 향이 나지 않았다. 저 높은 데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흰 꽃송이가 매달려 있건만 아무 향이 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꽃이 피었지만, 향이 없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본래 아카시아 향은 저 먼 산을 넘어온 바람 한 결에도 진하게 묻어나 온 마을을 달콤한 제 향내로 물들이건만 도심에서는 제 자리에서조차 그 향을 감춘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최근 생물학을 하신 한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더덕은 그 향과 맛이 아주 특별한데, 중국이나 일본의 더덕은 생긴 것은 똑같아도 향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향 없는 더덕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땅에 심으면, 신기하게도 향이 생긴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이 가지는 고유한 몫, 땅도 저 나름의 은사가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똑똑한 우리 인간들이 발 디딜 틈만 보여도 땅을 통제하여 땅 나름의 고유함을 잃어가 그가 품어서 다른 생명이 향내 나도록 하는 은사를 기억할 수 없게 만들었다. 향이 없는 아카시아 꽃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농촌살이에서 이즈음이면, 진달래와 온갖 봄꽃 화전에, 아카시아 꽃 튀김을 먹으며 하느님께 찬미 드렸었다. 무엇보다도 이즈음이면 꽃향기를 맡고 날아온 벌들이 바쁘게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제 향기를 잃은 꽃을 찾아올 벌이 있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땅과 꽃과 벌과 또 연결된 모든 생명에게….

어릴 때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며 나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가슴 떨리는 그런 사랑을 생각했었다. 이십 대 초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하면서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랜 울림 안에서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쉰이 넘어가는 때에 ‘사랑’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그동안 나는 사랑한다며 어떤 대상들을 봐왔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몇몇 대상들이 내 눈에 들어왔고, 그를 예수님처럼 보려 했고, 예수님처럼 대하려 했다. 주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시는 것을 느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알아보게 되는 예수님은 누군가가 자기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변의 인물들 속에 계시다. 도드라지지도 않고, 중요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다만 누군가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자신이 받은 귀한 사명으로 여기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려놓고, 포기해야 할 한계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는 중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인생 전체에 주요했던 어떤 기억들이 존재하도록 하는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숨은 기도와 도움의 손길들이다. 사랑한다고 떠벌리지 않으면서도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사랑, 내가 나 자신으로 살도록 하는 사랑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누군가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하는 주변의 손길이 되고 싶다. 그가 받은 은사를 발견하고 살 수 있도록 돕는 주변의 손길이 되는 것이 정말 큰 사랑임을 생각하며, 이를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땅이 다른 생명을 품어 그들이 제 향기를 내도록 하는 것, 꽃들이 벌들에게 꿀을 주고 열매를 맺어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 벌들이 제 노동으로 꽃들을 수정시키는 것. 모두가 자신의 몫은 ‘너를 위한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 연결된 퍼즐처럼 서로를 받쳐주고 끼워주며 연결된 하나의 작품이다. 이 사랑은 떠벌리고 돋보이고 화려하게 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의 몫을 제대로 살게 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타인을 위하는 것이 사랑의 원리라면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에게도 국민을 위한 사랑을 기대해봄 직하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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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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