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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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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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감각이 탁월하신 원로 신부님께서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젊은 형제들에게 훈화 말씀을 하실 때였습니다. “우리 살레시안들은 사순 시기에 더 잘 먹어야 합니다.” 저는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단을 선포하시면 안 되는데…. 대체 어떤 말씀을 하시려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신부님께서는 참으로 감동적인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 부디 잘 먹고 나서, 잘 먹은 만큼 더 많이 청소년들을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자주 청소년들 사이에서 현존하고, 더 많이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살레시안으로서 참된 단식입니다.”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닌 인도의 한 본당 주임신부님께서도 사순 시기를 맞이하는 본당 신자들에게 한 가지 소중한 지침을 주셨는데, 강론을 듣고 있던 교우들이 깜짝 놀랐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맥주를 많이 마십시다.”(Take lots of BEER during Lent.) 당혹해하는 신자들을 향해 주임신부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BEER=Bible(성경), Empathy(공감), Eucharist(성체성사), Reconciliation(화해)”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보다 자주 성경을 펼쳐 보십시오. 성경 안에 길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답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공감의 명수가 되십시오. 우리가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할 때, 바로 거기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더 자주 성체성사로 나아가십시오. 성체성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틈만 나면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고 자신과도 화해하십시오. 참된 화해가 이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입니다.


■ 광야 체험

언젠가 성지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 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 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마디로 고통스러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 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 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 부여 작업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본격적인 공생활 시작 전 예수님의 40일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그분께서는 유다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장 40일 동안이나 유다 광야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단둘이 머물면서 그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분께서는 정답을 찾으셨고,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광야로 들어가기 위해 굳이 비싼 돈 들여, 텔아비브나 두바이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대신 우리 내면 속 깊숙한 곳을 향한 여행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적 광야, 텅빈 공간,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들어올 수 있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감실, 내 안의 성전 하나를 건설해야겠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우리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놓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우리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이 되신 스마트폰, SNS, 신용카드, 술, 담배, 깊이 빠져버린 취미활동… 과감히 우리 손에서 한 번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 둘만 머물 수 있는 내 안의 성전으로 자주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침실 문만 열면 바로 건너편이 경당인데…. 너무 게을러서, 좀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지난날을 크게 뉘우칩니다. 주님과 나 단 둘이 머물기 위한 아주 좋은 교회 전통이자 지름길인 성체조배를 통해 나 자신 있는 그대로의 맨 얼굴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한없이 자비롭고 관대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보다 자주 문안 인사를 올려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 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 머물러 있으면 죽듯이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집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은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안토니오 교부)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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