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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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일상, 그대의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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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이 바로 그대의 성전이며 신앙이니라. 거기에 들어갈 때는 그대의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가라.”(칼릴 지브란)

지난주 친구가 비대면 성서통독을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통독 목적을 요약하는 이름을 지어 밴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몇 시간 후 고심 끝에 ‘아버지 말씀 매일 듣기’라는 이름이 탄생했는데 저는 순간 “우와!”라는 감탄과 함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15세기 토마스 아 갬피스는 영적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 첫머리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철저하게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의 생애처럼 자신의 삶을 영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에서 우리는 특히 예수님이 아버지 말씀을 매일 어떻게 듣는지 본받을 수 있습니다.


■ 유다인들의 파스카, 성전에서

요한은 성전 정화 이야기 처음과 끝에서 ‘파스카’에 대해 언급하며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라는 틀 안에 이 사건을 배치합니다. 노을이 질 때면 성전 대리석이 황금빛으로 반짝여 사람들을 황홀하게 했다는 성전, 파스카 시기에는 10만여 명의 순례자가 몰려들고 1만8000마리 양을 제물로 바친 성전의 임박한 멸망과 그분 몸을 통한 성전 재건을 이야기합니다.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의 제2성전 파괴는 요한복음서 저술에 깊은 영향을 미친 역사적 기준점에 해당합니다. 유다인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의 중심인 성전은 예수님과 요한복음서의 ‘유다인’ 곧 종교 권위층과 상호 관계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특히 ‘표징의 책’인 1-12장에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의 삶과 예배가 본래 의미를 상실한 성전을 대체할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요한 1,14; 1,29.39 등)

성전 예배에 대한 반대는 요한복음서의 근본 개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매여 있던 하느님 현존은 지금부터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분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전’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두 개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장사꾼을 몰아낸 성전 ‘히에로’(요한 2,14)는 넓은 이교도의 앞뜰을 가리키는데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 자체인 ‘나오스’(요한 2,19; 21)와는 다릅니다.

이 뜰은 성전에서 비유다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장소로 성전과 관련된 대규모 시장 영업이 번창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은 거룩한 하느님의 집, 기도하는 집이라기보다 특권층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는 장소로 변질됐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과 소와 양을 내쫓은 것은 제물로 바칠 짐승 가격을 매기는 권한과 상점에서 점포세를 받아 부를 축적하던 대사제와 성전 고위층의 큰 사업 이권과 특권을 위협하는 일이었고 그분은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이 됐습니다.


■ 사랑하고 분노하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을 중단하라고 분노하는 모습에서 세 가지를 질문해 봅니다.

첫째 “매일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심리학자들은 누가 화를 내면 “왜 화가 났니?”가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이 뭐니?”가 더욱 적절한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분노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 마음 깊이 원하는 것,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손상당할 때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의 거룩함이 훼손될 때 예의바르게 침묵하지 않고 온유한 어린 양에서 아모스서의 분노하는 하느님처럼 무섭게 포효하는 사자로 변합니다. 분노하는 것은 나쁜 것이며 교육학적으로, 정신의학적으로 좋지 않다고들 가르치지만 예수님도 분노했다는 것에서 저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1965년에 김수영 시인은 당시 정치와 사회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무능력을 성찰하는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나는 왜 작은 것에 분개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나는 온통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나와 내 가족, 내 공동체의 이득을 토대로 작은 것에 분노하지는 않는지? ‘공동 가정’인 어머니 지구를 해치는 일과 하느님 나라 선포에 무관심하지는 않는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 충실함과 일관된 자세도 본받아야 하지만 그분의 거룩한 분노도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본성이며 하느님께 청해야 할 귀한 선물입니다. 내가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고 원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 사이에서 섬세하게 식별하면서 살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둘째 “매일 나는 아버지 집에 거처하는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한 말씀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모님에게 한 말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자구적으로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유다인들에게 12살은 성년에 해당하는데 그 이후 30살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은 없지만 이 첫 말씀에서 예수님이 보낸 침묵의 기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성전에 머물 수는 없지만 가정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목수로서 일터에서 아버지의 말씀, 특히 십계명 가운데 첫 계명인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며(제1독서) 그분 뜻을 찾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일치하는 아들 예수님 모습은 요한복음서 나머지에서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셋째 “매일 내 마음이 장사하는 집은 아닌가?” 성전 정화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갈망의 상징적인 만남을 의미합니다. 매일 현실 안에 이 두 가지 힘, 두 개의 성전, 두 개의 세계가 만나서 투쟁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옛 성전은 새 성전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보이지 않으며 아주 작은 코로나19 균이 우리 몸을 순식간에 허물어 버리듯 마음도 사소한 선택으로 상처받고 아플 수 있습니다. 매일 아버지 말씀을 듣는 것은 온갖 잘못된 선택과 악이라는 질병에서 우리를 예방하는 백신입니다.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화답송) 아멘!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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