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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신앙살이] (581) 창고 청소와 노래방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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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 한 켠에서 늘 신경 쓰이는 곳은 여기 공소의 창고입니다. 그 이유는 창고 안에 들어가 보면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정작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필요한 물건을 찾기 위해 창고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나오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과장이 너무 심한가요!) 그래서 언젠가는 ‘창고 정리를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답니다. 수도원 형제들이 하루 봉사 활동을 하러 공소에 왔습니다. 그 인원의 절반은 나무 정리를 도왔고, 나머지 형제들은 창고 정리에 나섰습니다. 공소 회장님도 오셔서 창고 정리 ‘반장’역할을 하셨습니다. 형제들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 공소 마당에 펼쳐놓았고, 공소 회장님과 나는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구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소 회장님은 창고 안의 물건들 중 하나라도 더 다시 사용하고 싶어 하셨고, 나는 이왕 청소하는 김에 하나라도 더 버리려고 했습니다.

암튼 그 날, 내가 버린 것들은 고장 난 가전제품,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주방 도구들, 언젠가는 사용하려고 챙겨 놓았으나 내 생각으로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것들, 곰팡이가 잔뜩 핀 것들, 오래된 어린이 동화책 전집과 책 상자들, 부러진 나무 제품들, 깨진 유리 제품들…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창고를 정리하던 중, 창고 안에서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대형 노래방 기계를 마당으로 옮겼습니다. 그 기계는 외형적으로도 오래돼 버릴 때가 된 것 같았고, 작동조차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노래방 기계를 보는 순간 과감히 버릴 결심을 하는데, 공소 회장님께선 그 기계를 보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이거 작동이 잘 되요. 다시 창고 안에 잘 보관해야 할 것 같은디요.”

나뿐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버려야 할 물품 같은데, 공소 회장님께선 그것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잠깐, 공소 회장님과 나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의 기류가 흘렀습니다. 그래서 노래방 기계는 일단 공소 마당 한쪽에 놔두고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정리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했습니다. ‘정말 버리면 좋겠는데. 공소 회장님께선 왜 저 기계를 버리는 걸 그리도 주저 하실까! 노래방 기계가 필요하다면 새 거 하나 사도 될 터인데….’

그러다 쉬는 시간이 되자, 공소 회장님께선 내 곁으로 오셔서 이야기를 건네셨습니다.

“신부님, 작년하고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못 했는디, 매번 ‘공소의 날’이 돌아오면 우리 공소 식구들뿐 아니라 여기 심원면 주민들도 불러 동네잔치를 했어요. 그때마다 저 노래방 기계를 비닐하우스에 설치해 놓았는디, 글쎄 우리 교우들이 와서 노래를 부르는디, 어메, 어찌 그리 다들 노래를 잘하는지. 암튼 그날 하루는 노래방 기계 땜시, 신나게 웃고 떠들고 놀았당께요. 그때가 얼매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날 공소 회장님께선 노래방 기계를 보면서, 예전 공소 식구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다시 작업은 시작됐고 나는 형제들과 함께 마당 한쪽에 있는 노래방 기계를 들어 조심스레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노래방 기계를 청소한 후 그것을 잘 보관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그 노래방 기계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공소 어르신들의 추억이며 공소 식구 모두를 웃게 하고 울게도 한 감동 그 자체였다는 것을! 사실, 어르신들 곁에는 당신들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추억 또한 그만큼 쌓여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그래서 때로는 기계의 작동 여부로 ‘필요성’을 판단하지 않음을 알게 됐습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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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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