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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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영성 이야기] (74) 날수를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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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사는 초등학생이 시력 저하 때문에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저 나이에 벌써 안경을 써야 하니 앞으로 시력이 얼마나 더 나빠질까 싶고, 또 얼마나 불편할지를 아는 어른들은 걱정이 많았으나 동생이 하는 말은, “언니가 공부 잘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도 안경을 끼고 싶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하다. 끼아라 루빅도 포콜라레 영성을 사는 이들에게 자신의 직업에서 전문가가 되라고 격려하였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물론 공부를 해야 하고 그 공부를 잘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인간의 기억력이나 추리력을 추월하는 현대에 들어 더욱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식만이 아니라 지혜가 아닐까 한다. 그러니 공부를 하되 복음적 지향으로, 이웃에게 봉사하고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데에 쓰려는 다짐으로 역량을 쌓아야 할 것이다.

포콜라레 영성에서 우리 삶을 정돈하면서 보는 측면, 곧 지혜와 공부는 남색에 속한다. 이 남색 측면을 잘 살기 위해 직업에 관한 신지식과 사회적 임무에 관해 공부를 계속할 뿐 아니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도 항상 깨어 있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지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기를 권한다.

물은 색이 없어서 투명하지만, 그 물이 깊은 바다로 흘러들어 모였을 때는 짙은 남색으로 보이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지닌 낱낱의 지식이나 지능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쓸 때 통찰의 은사를 얻어 바다처럼 깊고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에 소용이 될 것이다.

병원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새로 들여온 기계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앞서 근무하던 직원에게서 인계를 받긴 하였으나, 한 번도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검사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직원이 퇴사한 이후에는 어디 물어볼 곳이 없어 난감하였다. 의료 기기 판매 회사 직원도 임상 상황은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듣기가 어려웠다. 내가 겪는 그 어려움을, 언제가 되든 나의 후임자도 겪게 될 터라,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업무에 관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기를 작동하는 법과 주의점, 그것을 임상에 적용한 결과와 수치, 어떤 질병과 연관이 있는지 등을 전문 서적을 일일이 찾아 가며 정리해 나갔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였으나 몇 개월이 지나 드디어 한 권의 묵직한 시술 자료집을 묶을 수 있었다. 함께 근무하는 의사들도 반가워하였고 부서장도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의료 기기 판매 직원은 자신이 복사를 해서 다른 병원에도 나누어 줄 수 있는지를 물어 왔다. 사실 나름의 노하우이기도 하고 다른 병원은 어떻게 보면 경쟁 대상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어느 병원을 가는 환자에게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내가 가진 지식도 기꺼이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밝히고 부서장의 동의하에 그 시술 자료집을 복사하여 다른 곳에도 줄 수 있게 하였다.

백배의 상은 곧 돌아왔다. 우리 병원의 기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예전과 달리 의료기 회사 직원이 부리나케 달려와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내가 자리를 비워야 할 때도 간단한 검사는 다른 직원이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병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어느 만큼의 인계 기간 후에 아주 홀가분하게 그만둘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 일을 통해서, 지식이란 형제에 대한 사랑을 첨가할 때 비로소 지혜로 거듭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편 저자는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라고 노래하였다. 날수를 세는 것이 삶의 근본을 깨닫는 일이라면, 그로써 슬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께 셈을 돌려 드리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마땅하고 합당한 일이겠는가!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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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6-15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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