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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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신앙살이] (592) 고마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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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목하던 새남터순교성지는 성당은 크지만 주변 땅은 그다지 넓지 않아 외적으로 할 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개갑장터순교성지에는 아담한 ‘외양간 경당’ 주변으로 넓은 성지가 조성되어 있어 할 일들이 넘쳐납니다. 과거 황무지였던 이 땅을 고창본당 교우분들이 성지로 가꿀 때 많은 나무들을 심어 현재 성지 내부는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유독 나무들 중에도 소나무가 많아 전정 작업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문득, 소나무 전정에 일가견이 있는 모 교구 동창 신부님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이건 천우신조, 그래 생각날 때 전화하자.’ 나는 곧바로 그 동창 신부님께 안부 전화를 하면서 소나무 전정 작업을 부탁했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정말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한 번은 주일날 저녁에 성지에 와서 그 주간 토요일 오전까지, 또 한 번은 2박3일 일정으로 와서 성지의 수많은 소나무와 그 밖의 나무들의 전정 작업을 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는 악덕 성지 신부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꼭 악덕 신부처럼 동창 신부님에게 어마어마한 나무 전정을 계속해서 주문했습니다. 공소에서 아침 7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컨테이너 숙소에서 차를 한잔 마신 후 이내 성지로 달려가면 저녁 6시, 혹은 7시까지 동창 신부님에게 작업을 시켰습니다. 그럴 때마다 동창 신부님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호주머니에는 전정가위 두 개를 담은 후, 그 밖의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손에 들고 성지 전체를 다니면서 아무 말 없이 소나무를 중심으로 주변 전정 작업을 했습니다.

소나무 전정에는 문외한인 나는 동창 신부님 옆에서 작업은 못했지만, 그 신부님이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야외에서 일해준 덕분에, 나 또한 성지 사무실에서 성지 관련 다양한 여러 업무들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기쁨은 점심시간입니다. 이른 점심을 먹은 후 20분 혹은 30분 정도 주변의 자연을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하는데, 그때마다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아는 이야기도 또 하면서 과거의 시간 속을 마음껏 넘나들었습니다.

지금 고백하지만, 공소에는 손님방이 따로 없어서 동창 신부님이 잠을 잤던 컨테이너에는 숙박에 필요한 아무런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공소 마당 한편에 마련된 공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고, 세면을 하려면 옆 컨테이너에 가서 씻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땀 흘리며 작업을 한 후에도 샤워를 하려면 내 방 화장실에서 했습니다. 그렇지만 동창 신부님의 얼굴에는 늘 잔잔한 미소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점심을 먹는데 동창 신부님이 손가락을 잘 쓰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가 유심히 봤더니, 오른손 전체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고 또 아문 손에 다시 물집이 생겼고 물집 주변에는 피부 껍질이 다 갈라져 있었습니다. 늘 장갑을 끼고 있어서 못 봤는데, 일하는 내내 손에는 물집이 생겼다 아물다 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짠하고 미안하던지! 그런데 나는 도리어 나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물집 생기면 좀 쉬지 그랬어. 사람 마음 정말 미안하게 만드네. 많이 아프지?”

내 말에는 아랑곳없이 동창 신부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석진아. 나는 네가 지금처럼 여기서 행복하게 살면 돼. 그러면 다 좋아.”

단지 ‘친구’라는 이유로 내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를 보러 먼 길을 찾아왔고, 묵묵히 내 삶의 시간 길을 함께 걸어가 준 소중한 친구 신부님.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마운 일입니다. 하루 온종일 내 옆에서 말없이 나를 응원하고 나를 도와준 친구가 있으니 행복했습니다. 지금 당신 곁에도 좋은 친구가 있다면, 그건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잘 한일이고 가장 고마운 일입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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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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