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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기자의 엄마일기] (21)아내와 엄마… 늘어난 주어만큼 넓어지는 이해의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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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이제 설거지랑 밥, 청소, 빨래 다 손 놓았네. 어쩜 아무것도 안 해?”

아이들을 막 재운 밤, 남편이 빨래를 개며 말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쓴 지 1년 6개월, 가사와 육아가 남편 영역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내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해? 못하는 거지! 자기는 일하면 퇴근하고 집안일 했어? 올챙이 적을 생각해. 주말에는 내가 세끼 다 차려서 먹이고 청소도 하잖아.”

이거 뭔가 내가 살림할 때 남편에게 자주 들었던 말 같다. 내 언어에서 핑계와 변명으로 얼룩졌던 남편의 냄새가 난다. 남편이 한술 더 뜬다.

“내일은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혼자 다 해볼래?”

오랜만에 평일에 휴가를 냈는데, 혼자서 두 아들을 먹이고 씻기고, 등원까지 다 해보라는 의기양양한 말이었다. 시간은 정직해서 아이들과 투닥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쓴 남편에게 더 너그러웠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허덕일 게 뻔해 되받아쳤다.

“나는 안 그랬다. 일하는 남편, 쉬는 날에는 조금이라도 더 자게 뒀지. 내가 주말에 늦잠 잔 적 있어?”

남편은 “두 아이의 학부형을 해봤느냐” 되물었고, 어이가 없어진 나는 어이없게 “모유 수유하면서 가슴이 아려오는 고통을 아느냐”고 공격했다.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화생방 가스 마셔봤어?” 결혼한 지 7년 된 우리는 유치찬란한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는 “나는 해봤는데, 너는 언제 해봤느냐”로 이어졌다.

다음날, 다행히 사이좋게 두 아이를 등원시키고 오붓하게 영화를 보러 갔다. 많은 아내가 남편이랑 같이 보고 싶은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육아휴직을 내려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니가 벌면 우리 아들만큼 버느냐”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팠다. 그리고 딸이 우울증이라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중년의 친정엄마는 목놓아 울면서 말한다. “엄마가 애 봐줄게. 너 하고 싶은 일 해.”

82년생 김지영들의 고통에 ‘김지영의 남편들’이 아닌 ‘김지영의 엄마들’이 다시 소환되는 그 장면이 서글펐다. 이미 받아주고, 보살피고, 희생하는 것으로 한 시절을 보낸 우리 엄마 세대가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육아와 가사에 서툰 남편들의 마음도 이해하게 됐다. 가사와 육아에 서툴어진 내게 남편이 잔소리를 쏟아내면, 남편이 그렇게 밉다. 퇴근하면 쌓인 설거지와 밀린 빨래를 해야 한다는 남자 직원 말에 공감의 눈빛도 조금은 보내봤다. 살다 보니 수많은 주어를 가져볼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 희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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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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