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2011년 라메지아 테르메(Lamezia Terme)를 사목방문하셨을 때 미사 강론 중에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1-14 참조)에서 ‘혼인 예복’은 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사랑’을 상징합니다”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모름지기 하느님 나라에 불린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예복’을 잘 준비하여 갖춰 입어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한 잔치(이사 25,6 참조)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께서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났습니다」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창조된 모든 존재의 원천이기에 그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갑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비참하고 가련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갑니다”라고 강조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흔히 ‘이사야 묵시록’이라고 부르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시고 구원이시다”(이사 25,9 참조)라는 선포를 장엄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서 “기쁨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세상의 즐거움도 사라진”(이사 24,11)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 멈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하느님(필립 4,19 참조)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는 「영혼의 성」에서 “영혼, 즉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자기에게 지워진 의무보다 얼마나 적게 섬기고 있는가, 적은 그것이나마 흠집투성이요, 이지러지고 얼마나 게으름으로 뒤범벅이 된 것인가를 똑똑히 보게 됩니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자기를 맡겨 드리는 편이 나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부연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는 사람”(필립 4,12 참조)이라고 담대하게 증언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도의 당당함은 이른바 ‘다마스쿠스 체험’(사도 9,1-19; 2코린 5,11-21 참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결국 내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시작됩니다.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리비오 멜리나 몬시뇰께서는 「사랑의 길」에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에게는 큰 모험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진정한 사랑의 목적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것이라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거부에 직면했을 때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십자가는 인간 자유에 대한 궁극적 초대이자 존중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이들에게 진노했다는’(마태 22,3-7 참조) 비유로써 ‘하늘 나라’에 불린 이들이 지녀야 할 마땅한 응답을 성찰케 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는 자유를 선사하셨는데, 이 자유는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신앙의 가장 순수한 작용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께서는 「신앙생활에 대하여」에서 “사랑이 신앙의 직접적인 작용, 즉 신앙 활동이며 신앙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이 없는 신앙은 분명히 질식해 버릴 것입니다”라고 새겨 주십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을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회심을 일으키고, 무관심과 무의미를 깨뜨려서 참된 자신을 보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증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시는 유일한 증명서”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하늘 나라의 잔치를 위한 예복 준비에 설레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