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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핏발선 저항도 무력한 순응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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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인간은 ‘고통’이라는 현실 앞에서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아무리 위험하고 불안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 하더라도 투쟁하거나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투쟁이 결코 희망을 가져다주는 온전한 혁명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안전한 종속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주간으로 들어서는 사순의 마지막 주일에 봉독되는 본문들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선택과는 다른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극도의 고통과 비참 속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결코 불의에 대한 저항도, 종교적 심성의 발로인 비폭력 순응도 아닌 매우 독특한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체념으로 말미암은 수동성이나, 좌절과 절망에 항복하는 무기력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있었고, 동시에 민중의 분노를 가열시켜 체제 전복을 부추기고 사회를 광폭에 휘둘리게 하는 선동성을 품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항도 순응도 아니었던 예수님의 태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발성’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관계에 들어선 이들 사이에는 그 어떤 의무나 규칙의 강요 없이도 저절로 파고드는 극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한 충직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 어떤 힘에도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발적인 헌신과 내어줌, 신뢰와 신념으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십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 사건은 모든 공관복음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인데,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달리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잔혹한 고문이나 치욕적 순간들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자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상 죽음을 결코 비극적 사건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루는 여정이며 이미 예고된 필수적 사건(루카 24,6.44.46 참조)으로 보려는 저자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특별히 루카복음은 ‘마지막 만찬’ 장면에,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을 삽입해 두고 있는데(23,24) 이는 이어지는 내용, 즉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낮아지는 자세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을 염두에 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실존적 변화는 헌신과 내어줌을 통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가장 낮아지는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은 그 길이 곧 구원이며 영광이라는 역설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인간의 실존적 변화는 훌륭한 교육이나 지성, 우아한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헌신이나 내어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체험하고 목격했을 때에만 제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고학력자들이 넘쳐나고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회의 질적 향상과 직결되지 않음은 작금의 우리 사회를 관찰할 때 쉽게 확인됩니다. 성공과 행복을 위해 혹독하게 교육받고 세상이 만들어낸 가치에 적합한 존재로 제조되는 숨 막히는 과정을 무던히도 감수하지만, 그 교육의 결과로 난무하는 것은 상대적 빈곤과 공허한 결핍, 추태와 위선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나를 위한 누군가의 헌신과 내어줌, 항구한 사랑과 희생을 직접 목격하고 배우며 그 경이로움에 온전히 동화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는 기본 규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몸소 증거하셨는데, 우리를 정치적 능력이나 군사적 힘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시고 온전히 내어주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서는 특별하게,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십자가상의 두 강도의 대화를 통해 대별시킵니다. 두 사람의 상반된 행위는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전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죄수는 그분을 여전히 모독하고 비난하며 하느님과 운명을 저주하지만, 다른 죄수는 그러한 상대방을 꾸짖고 예수님의 무죄함과 의로움을 선언합니다.(39-40절) 그리고 이러한 지고한 사랑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임을 전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1-42절) 이 강도의 고백은, 수난과 죽음을 선택하셔야 했던 예수님의 의도가 실현되는 중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겸손과 진리, 인간을 위한 진심 어린 사랑을 목격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고 마침내 구원되기를 간청하는 것, 이 진정어린 관계야말로 생명을 바쳐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목적하고 추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 수난받는 주님의 종과 바오로가 증언한 예수님의 고난

제1독서의 이사야서 본문 역시 모든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힘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임을 알려줍니다.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격려할 줄 알게…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듣게 하신다.”(이사 50,4) 특별히 주님의 종은 모욕하는 자들의 폭력에도 물러서지 않는데(5-6절)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7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일반 영웅들이 남겼던 역사적 서사와는 분명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의 죄를 밝힘으로써 누가 진정한 의인이고 죄인인지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그 수난과 죽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인지를 과시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인정하시어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십니다.(제2독서, 필리 2,9)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님의 방식은 하느님에 의해 드높여지고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통을 종교로 승화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종교가 아편’이 되는 순간을 허용하는 말인 듯하여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분의 고통이 우리의 불행보다 더 처참한 것이었기에 상대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도, 그분처럼 잘 참으면 천당에 가게 된다는 편의적 발상도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제도와 규범 안에 얌전히 구속되어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고통은 천국을 위한 보험처럼 안전성을 보장해준다는 프레임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는 것은 도덕과 금기의 이름으로 감시와 위선만을 더욱 양산시키는 구조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가장 낮고 위험하며 고독한 곳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신 구원의 본질을 축소시키고 왜곡할 여지를 갖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며 무엇을 소유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충만히 채우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때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을 이루는 힘은 누군가의 정직한 내어줌과 사랑에 근거합니다. 메시아의 수난은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계획되고 실현된 위대한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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