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9명 가운데 4명이 가톨릭 신자다. 그런데 이달 말이면 한 명 늘어 5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새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 브렛 캐버노(53)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판사도 가톨릭 신자다.
연방대법원은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기능을 합친 최고 사법기관이다. 낙태와 동성혼, 인권과 인종차별, 정치 스캔들 등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릴 때마다 사회가 요동치곤 한다.
미국 예수회가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아메리카」는 연방대법원 ‘9인의 현자(賢者)’ 가운데 가톨릭 신앙을 가진 이가 5명이나 되는 이유를 분석했다.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개신교회에 나가는 닐 고서치 대법관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6명이다. 미국은 인종과 종교의 용광로인 데다 종교적으로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궁금증이 더하다. 가톨릭 신자 비율은 20다.
법조계와 의료계에 많이 진출
「아메리카」는 먼저 가톨릭 신자들이 전통적으로 법조계와 의료계로 많이 진출하는 점을 들었다. 이 전통은 미국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가톨릭에 대한 편견에 맞서 자신들 권리를 지키려고 했던 이민자 부모 세대의 교육관과 연관이 있다.
19세기 중반 대기근과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대거 건너간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남부 가톨릭 신자들이 대도시 변두리에 이민 보따리를 푸는 순간 맞닥뜨린 것이 앵글로색슨-개신교계의 멸시적 시선이었다. 부모들은 자녀들만이라도 실용적인 직업을 찾아 가난과 차별에서 빨리 벗어나길 원했다.
부모들의 이런 ‘한 맺힌’ 교육관은 1955년 가톨릭 학자 존 엘리스가 쓴 수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미국 가톨릭 문화는 젊은이들을 자꾸만 법조, 의료계 같은 실용 분야로만 진출시키려고 한다”며 “가톨릭 학습 전통이 가장 강한 인문 및 예술 분야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욕망이 덜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트르담대학 윤리ㆍ문화연구소의 도어플링거 연구원은 인간 삶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사회교리 영향에서 원인을 찾았다. 그는 “개신교인들은 하느님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가톨릭 사상은 건국 이념과 사회교리 기초 원리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다리’를 놔준다”고 말했다. 개신교인들은 성속이원론적 믿음이 강해 법으로 먹고사는 직업을 마뜩잖게 여겼다는 것이다.
신자들의 보수적 성향이 영향 미쳐
가톨릭 신자들 성향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점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대법관 지명권자인 대통령으로서는 진보적 판결로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판사보다는 사회 안정을 염두에 두고 법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판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종신직이라서 대통령들은 대법관을 임명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가톨릭 대법관 5명 가운데 4명이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들이다. 이 중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은 강경 보수로 분류된다.
그렇다고 이들의 가톨릭적 신념이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판사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헌법 정신에 기초해 법을 다루는 사람이다. 이미 고인이 된 가톨릭 대법관 윌리엄 브렌난과 안토닌 스칼리아의 경우 사형제와 낙태에 대한 법 해석이 달랐다.
보스턴대학의 캐슬린 카베니 법학과 교수는 가톨릭 신자가 연방대법원에 다수 포진한 데 대해 “역사적 편견에 대한 승리”라며 “가톨릭이 미국에 완전히 통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개신교’ 등식이 깨졌다는 평가다.
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