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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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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일 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어느 한적한 시골길이다. 무대 위에는 헐벗고 뒤틀린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서 있다. 두 사람이 지루한 표정으로 뭔가를 기다린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듯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그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고도는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삶을 끝없는 기다림에 비유한다. 두 주인공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면서도 막상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오기로 한 시간과 장소가 맞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심지어 그런 약속이 있었는지조차도 희미하다. 그저 오래된 습관처럼 기다릴 뿐이다. 고도는 대체 무엇일까? 신일까? 빵일까? 자유일까? 희망일까? 작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어느덧 세밑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기다림의 계절이다. 겨울나무는 움츠린 채 봄을 기다린다. 거리의 천사들은 따뜻한 나눔의 손길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대림초에 하나씩 불을 밝힌다. 구유를 만들고 캐럴을 울리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한다. 많은 사람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분노를 정화한 순백의 불꽃으로 뭔가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대통령의 하야인가? 새로운 대통령인가? 제도와 관행의 타파인가? 체제를 부수는 혁명인가? 우리는 또 무엇을 기다리는가? 아기 예수의 탄생인가? 그분이 선포할 새로운 왕국인가? 어둠을 밝힐 빛인가? 해방과 구원의 약속인가?

우리는 종종 기다림의 정체를 모른다. 그분은 해마다 오시지만 세상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다. 그분이 언약한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은 어째서 열리지 않는 것일까? 집권세력이 바뀌어도 정경유착과 권력비리의 병폐는 끊이지 않는다. ‘정의가 빛처럼, 공정이 대낮처럼’(시편 37,6) 밝은 나라는 정녕 꿈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새로운 정치, 새로운 국가,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지만 늘 좌절한다. 잡초를 뽑아낸 자리에 새로운 잡초가 자란다. 밀 대신 엉겅퀴가 나오고 보리 대신 가시덤불이 솟는다. 연극 속의 한 인물은 이렇게 읊조린다. “빛은 잠시 비출 뿐 곧 다시 밤이 오지.”

시대의 어둠은 쉬이 물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 뽑은 대통령 탓만은 아니다. 인물과 정파를 바꿔도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을 바꿔야 한다. 권력자의 한 마디에 정치인도 기업인도 공무원도 지식인도 맥없이 굽실거리는 이 허약한 시스템이 문제다. 박근혜 너머의 박근혜, 최순실 너머의 최순실을 봐야 한다.

빛이 오면 어둠은 사라질까? 빛은 이미 오셨고, 또 새롭게 오신다. 세상이 여전히 어두운 것은 우리 안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 굴종하고 돈에 빌붙는 우리 안의 탐욕을 보아야 한다. 내 안에 최 선생이 있고, 우리 안에 박 여사가 있다. 뒤틀린 권력의지와 물신숭배가 어둠을 낳고 빛을 가린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바라본다. 내가 기도한 만큼 세상은 맑아질 것이다. 마음속에 촛불을 켜고 스스로 밝아진 만큼만 세상의 어둠은 줄어들 것이다. 내가 밀어낸 만큼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고, 우리가 땀 흘린 만큼만 세상은 공정해질 것이다.

해가 떨어질 무렵 한 소년이 나타난다. 그는 고도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고 전한다. 그렇게 기다림은 허망하지만 뿌리칠 수 없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기다릴 것이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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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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