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신앙 공동체 중심이 된 일가
1488ha. 1ha가 3025평이니, 무려 450만여 평의 땅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의 소유였다. 전주 인근 10여 개 고을에 걸쳐 1만5000마지기(1마지기 300평 기준으로 1487만633㎡)를 소유한 대부호였던 셈이다. 이처럼 ‘남부러울 것 없는’ 대부호였던 그는 왜 순교의 길을 걸었을까? 그 많은 땅과 재산, 명예, 목숨까지 바치며 온 가족이 다 함께 신앙을 증거해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그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유항검 일가 가운데서 순교자는 모두 10위다. 유항검을 비롯해 부인 신희, 맏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동정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동생 유관검ㆍ이육희 부부와 그의 아들 종선ㆍ문철, 장조카 유중성(마태오, ?∼1802) 등 일가족이다. 이 가운데 유항검과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 유문석, 유중성 등 5위가 이번에 시복됐다.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노비로 끌려갔으며, 적몰 재산은 모두 호조에서 환수했다. 그가 살았던 집은 헐어 없애고, 그 터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는 이미 조명한 바 있기에 이번에는 유항검ㆍ문석 부자와 조카 유중성의 삶을 들여다본다.
▲ 복자 유항검 |
1786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했을 때 그는 호남의 사제로 임명돼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줬다. 이른바 ‘가성직 제도’였다. 하지만 얼마 뒤 교회 지도층은 이런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에 따라 유항검도 자신의 성무를 중단했다. 이로부터 조선 교회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본격화하는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베이징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유항검이 댔다. 1790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항검은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1791년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피신했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유항검은 아우 유관검을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했고, 마침 조정에서 주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 또한 박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선다.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주 신부가 전주에 도착하자 유항검은 주 신부를 모셔와 인근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맨 먼저 체포됐으며,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쳐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해 10월 24일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 복자 유문석 |
▲ 복자 유중성 |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