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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사는 사람들] (3)- 두 번의 암 극복하고 이주민들 보살피며 사는 이상금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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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들의 엄마’로서 새 삶 행복합니다

▲ 이상금 수녀가 ‘아이들’에게 줄 빵을 들고 비닐하우스에 들어가고 있다.

“위암 3기 말입니다.”

2005년 가을 갑작스러운 위암 진단에도 이상금(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는 담담했다.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이 세상을 떠나면 그토록 사랑하는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이니 아쉬울 게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예수님이 날 예뻐하셔서 병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다.

2007년 봄 또다시 암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유방암이었다. 수술이 끝나자 오른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 시작됐다. 2년 전 한 차례 겪어봤지만 항암 치료는 여전히 괴로웠다.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에 걸리면 낫지를 않았다. 몇 달 동안 기침을 달고 살아야 했다. 고통이 잦아들지 않자 우울증이 찾아왔다. 단 한 번도 하느님을 원망한 적 없었던 수녀는 처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했다.

2012년 초봄 이 수녀는 ‘면형이주민문화센터장’이라는 소임을 받았다. 경기도 여주ㆍ이천시 일대에 사는 이주민들을 돌보는 사도직이었다.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 수백 명을 자식처럼 챙겼다. 늘 그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하소연하는 이가 있으면 앞장서 해결해줬다. 이주 노동자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수녀를 가장 먼저 찾는다.

부활 제3주일을 맞아 두 번의 암을 극복하고 이주 노동자들의 ‘엄마’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 수녀를 만났다. 10일 여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에서 만난 수녀는 “이주 노동자들을 돌보면서 건강도 좋아졌다”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산다”고 말했다.

이 수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따라 새벽 예배를 다녔다. 부흥회도 많이 참석했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게 꿈이었다. 항상 어떻게 하면 평생을 하느님 곁에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천주교에 수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아는 사람이 수원에 있는 한 수녀원을 데려가 줬어요. 수녀님 몇 분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수녀원이 천국처럼 느껴졌죠. ‘저기가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오로지 수녀가 되기 위해 개종(改宗)을 결심했다. 그해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주임 신부 눈에 띄기 위해 매일 성당 맨 앞자리에서 미사 참례를 한 이 수녀는 당시 수원 북수동본당 주임이던 김병열(원로사목자) 신부에게 입회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김 신부는 “수녀원도 사람 사는 곳이라 서로 싸우기도 하고 갈등도 있다. 잘 생각하고 판단해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이 수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추천서를 받아 영세 3년 만인 1985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입회했다. 스물네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수녀원 생활은 이 수녀가 예상했던 대로 정말 행복했다. 이런 천국이 다 있을까 싶었다. 동료 수녀들은 몸이 약했던 이 수녀를 친자매처럼 챙겨줬다. 기도하는 시간도 행복했고 공동체 생활도 정말 좋았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2003년부터 2005년 초까지 멕시코 한인본당에서 사도직 활동을 했다. 잠깐 한국에 있을 때는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바삐 사느라 10년 가까이 건강검진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위암 판정을 받았다. 투병 생활은 힘겨웠지만 기쁘게 고통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2년 후 안동교구 문경본당에서 있을 때 다시 찾아온 암은 더 이상 반갑게 맞을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절망을 체험했어요. 불안하고 우울했어요. 사람들도 만나기 싫고…. 버림받은 느낌이었어요. 고통에 몸부림치며 하루하루 버티다가 어느 날 밤에 혼자 성당에 들어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런 큰 고통을 주시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어요. 한바탕 울고 났더니 위선의 껍질을 벗어던진 느낌이었어요. 저는 늘 고통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교만이었던 거죠.”

그렇게 울부짖은 다음 날부터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진정한 부활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짓누르던 우울증도 사라져갔다. 이 수녀는 “하느님은 내게 또 한 번 생명을 주셨다”고 말했다.

2012년 면형이주민문화센터 센터장이 됐다. 이 센터는 사무실이 없고 직원도 없다. 이 수녀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사무실이다. 차 트렁크에는 ‘아이들’에게 줄 빵과 쌀 영양제 그릇 등 갖가지 식료품과 물건이 실려 있다. 이 수녀는 이주 노동자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낯선 나라에 온 아이들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동안 어려움을 호소해요. 문화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아서 농장 주인이랑 갈등도 많고요. 제 소임은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농장 주인과 아이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농장 주인들이 저를 경계했었는데 지금은 무슨 일이 생기면 주인이 먼저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하죠.”

10일 오후 이 수녀와 함께 ‘아이들’이 일하고 있는 이천의 한 농장을 찾았다. 상추 시금치 등 갖가지 작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 수백 채가 있었다. 이 수녀는 새참으로 준비한 빵을 나눠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아이들’은 멀리서부터 이 수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농장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에게 “수녀님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글교실을 꾸준히 다닌 덕분에 다들 한국어를 곧잘 했다.

동티모르에서 온 베두(31)씨는 “수녀님 덕분에 한글 공부도 하고 여름에는 놀러 가기도 했다”면서 “사장님이랑 사이가 안 좋을 때 많이 도와주셨다. 수녀님 덕분에 사장님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칭찬을 늘어놨다.

네팔 출신인 마야(30)씨는 “수녀님은 마음이 정말 좋은 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마야씨의 말을 듣고 있던 이 수녀도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글·사진=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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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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