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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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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채보상운동

청일전쟁 이후 일제는 청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한국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제는 한반도를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이란 이름으로 침략을 시도했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했다. 일제에 대항하는 교회의 침략 반대 운동은 이 기도회를 계기로 촉진되었다. 조국의 주권 수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시 한국 천주교회 신자의 일반적 정서였다.

독립신문은 이미 1897년 7월 31일자 사설에서 당시 조선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관련 “지금 조선은 생사가 촌각에 달려 있는 매우 위태한 병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아들과 딸들과 친구들이 병시중 들 생각은 않고 남의 일 보듯이 보고만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부모보다 더 중한 나라가 병이 든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질타했다.

서상돈 또한 울분을 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했다. 만민공동회란 독립협회가 주관한 자주독립 수호를 위한 민중대회 혹은 민중운동이라 할 수 있다. 서상돈은 재무부 과장 부장을 맡아 빼앗긴 이권을 되찾고 민권 보호를 위해 맹렬하게 투쟁에 앞장섰다.

일제 경제 침략의 시작

일제의 야욕은 갈수록 노골화됐다. 대한제국을 빚으로 옭아매 경제권을 빼앗는다는 철저한 계산 아래 대한제국 정부가 원치는 않는 빚을 억지로 쓰게 했다. 일제의 한국 침략 정책으로 1907년도 예산 1370만 환 가운데 1300만 환(원금 1150만 환 이자 150만 환)이 일본의 차관으로 채워졌고 일본은 1할의 고금리 이자를 갚게 했다. 빈약한 국고로는 도저히 이 거액의 국채를 상환할 수 없다는 게 당시의 국론이었다. 보다 못해 민간 차원에서 “나랏빚을 갚아 주권을 사수하고 민족경제를 이어나 가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제가 1905년에 시작해 1909년에 끝낸 ‘화폐정리사업’은 백동화 등 조선 화폐를 없애고 일본 화폐만 쓰게 함으로써 조선의 화폐 금융 체계를 일본 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켰다. 많은 조선인이 재산을 잃었고 그만큼의 재산이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한국 상인 중 재산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적 토양은 을사늑약 이후 크게 일기 시작한 애국 계몽사상이었다. 사회의 여론과 민중의 심리를 대변하여 제일 처음 대구 지방의 애국지사들이 나섰다. 대구에도 자강(自强) 사상이 보급되어 있었는데 1906년 1월에 대구광문회가 조직되었다.

대구에 내려온 서상돈은 1906년 1월 김광제와 함께 대구 ‘광문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김광제는 사장 서상돈은 부사장에 취임해 외국의 신학문을 도입하고 실학자들의 저술을 번역 편찬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양시키는 사업을 했다. 나아가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서상돈은 김광제와 더불어 1906년 3월 남문 밖의 관덕당을 보수하고 사범학교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김광제와 서상돈은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구이사청(大邱理事廳)을 만들자 백성이 의지할 수 있는 기반 구축 작업으로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설립을 추진한다. 1906년 발족된 대구민의소의 설립 취지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을 보급하며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황무지 개간에 진력한다”는 것이었다.

대구 광문사와 대구민의소 조직은 근대 교육 보급과 민지계발(民智啓發)의 일환이었다. 2월 경북관찰사 신태휴는 관내를 순회하면서 대구 광문사 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관찰사는 각 군에 학교 설립과 서적 구입 등에 관한 일체를 대구 광문사에 문의하도록 지시했다. 서상돈은 김윤란 정규옥 서병오 등과 함께 500환의 기금을 출연하는 등 재정적인 기반 확충에 진력했다.

▲ 서상돈.

▲ 김광제(1866~1920)는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을 지내면서 서상돈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다.

서상돈과 김광제의 만남 국채보상운동의 시작

1907년 1월 서상돈은 대구 북성로 광문사(현재 수창초등학교 정문 옆)로 갔다. 사장실로 들어서자 김광제 사장이 서상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상돈이 15년 연상이었으나 김광제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김광제는 특별회의의 안건에 대해서 서상돈의 의견을 구했다.

“광문사라는 이름에 대동(大同)이라는 말을 붙여 대동광문사(大同廣文社)로 개칭하자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선진 학문과 근대 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 의식을 고취하여 우리 민족을 계몽해 보자는 취지로 설립한 우리 광문사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출판인쇄사로 보이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서상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김광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서상돈은 막강한 재력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했던 경륜과 애국심으로 대구의 여론을 선도하고 있었다. 또 그는 광문사에 제일 많은 금액을 투자한 실질적인 사주였기 때문에 김광제도 광문사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는 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서상돈은 광문사의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을사늑약 때 동래경무관을 사직하고 올린 김광제의 상소문으로 서상돈은 김광제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시국이 워낙 어수선하니 힘에 부칩니다. 일본이 우리 조정에 억지로 차관을 들여오고 국채를 발행하게 하여 그 돈으로 일본인 거류민들을 지원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할 조직을 키우는 데 쓰고 있다니 큰일입니다. 나랏빚이 벌써 1천300만 환이라는데 매년 재정적자가 77만 환이라 하니 언제 나랏빚을 다 갚겠습니까? 외교권까지 뺏긴 마당에 빚까지 갚지 못하면 나라를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저 앞이 캄캄할 따름입니다.”

서상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김광제는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 하루 전의 풍경이다.

이튿날 서상돈의 집엔 김광제 등 광문사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구광문사 문회(文會)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였다. 회의를 마친 자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격 발의하였다.

“국채 1300만 환을 갚지 못한다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하므로 지금 국고금으로 갚을 수 없는 국채를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십시다. 저 부터 800환을 내겠습니다.”

서상돈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울컥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2000만 동포 한 사람이 60전씩 거두기는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한 달 담뱃값만도 20전은 됩니다. 석 달 동안만 담배를 끊으면 60전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서상돈의 발의에 참석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서상돈은 이 제의를 하면서 자신부터 앞장서겠다고 800환을 내어놓았다.

그 당시 신문 구독료가 한 달 30전 쌀 한 말값이 1환 80전임을 감안하면 서상돈의 의연금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서상돈의 제의가 결코 즉흥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광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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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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