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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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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재상(宰相)이돼 돌아오니 조국은 독재의 늪으로

장면은 1949년 1월 6일 워싱턴에서 초대 주미대사 임명 전문을 받았다. 제3차 유엔 총회를 마치고 파리에서 짐을 모두 본국으로 부치고 달랑 가방 두 개만 들고 미국에 왔는데 믿어지지 않았다. 그해 1월 1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개별 국가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대사라고는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음날부터 아는 각국 대사를 찾아가 서식이며 편제 인적 조직 등을 배우면서 개별 국가로서 대한민국 승인을 호소했다. 3개월 만에 33개국의 승인을 받아내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여비서를 보내주며 세세한 부분까지 도와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도움이 컸다.

▲ 1949년 1월 20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예복과 모자를 갖춘 장면의 모습이 이채롭다. 뒤에 보이는 뷰익 승용차는 장면이 제3차 유엔 총회 때 여비 가운데 절약해 저금해 둔 3000달러로 구입한 대사 전용차다.

차가 없어 시간당 5달러씩 하는 택시를 이용했다. 어느 날 중화민국 대사관을 방문하고 나오자 시간이 지났다며 택시가 가버렸고 필리핀 대사관을 나섰을 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30분 동안이나 비를 맞으며 택시를 기다려야 했다. 장면의 회고는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때의 비애감은 잊을 수 없다. 서울에 연락하니 ‘중고차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대사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새 차 ‘뷰익’을 구입했다. 파리 유엔 총회 때 여비 중 절약하여 저금해 둔 3000달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6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석한 국무총리 장면(왼쪽)이 1951년 11월 20일 6·25 한국전쟁 참전국 대표들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며 환영 연설을 하고 있다. 가운데는 리(Trygv Lee) 유엔 사무총장.

장면은 그 차를 타고 그해 1월 20일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 대통령의 취임식에 특사로 참석했다. 그때 고용한 인디언 운전사 위긴스가 2년 후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 받아 귀국할 때 흑인 부인과 함께 “한국까지 따라가겠다”고 떼를 써 겨우 말렸다. 그 부부는 난생처음 장면으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을 이국에서 실천한 장면의 한 모습이다.

그해 3월 25일 성모 영보 대축일(지금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붓글씨로 ‘북미주합중국 주재 특명전권대사’라고 쓴 신임장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대사 신임장 1호였다. 1888년 1월 최초의 주미 공사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이 고종 황제의 국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공관을 개설한 지 꼭 61년 만이었다.

▲ 1950년 봄 10만 달러를 주고 구입한 주미 한국대사관 전경. 장면은 이 대사관과 정원을 무척 아끼고 가꿨다.

이제 대사관이 필요했다. 우선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서 쓰던 콜롬비안 빌딩 내 10평짜리 사무실에 임시로 간판을 내걸고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봄 세리든 서클에 위치한 4층 건물과 대지를 구입해 증축함으로써 공관의 위용을 갖추고 조직을 완비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대사관의 기초가 다져질 무렵인 1950년 1월 12일 난데없는 ‘애치슨 선언’이 터졌다. 한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 방위권에서 제외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그어진 것이다. 참담한 지경에 빠진 한국과는 달리 소련과 북한은 쾌재를 부르며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장면은 그 즉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을 만났으나 확답을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6ㆍ25 한국전쟁 발발 한 달 전인 5월 28일 군사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4만 5000명의 철수를 완료했다. 전쟁이 터지자 무기도 없이 38선을 지키던 국군은 구천직하(九天直下)로 패퇴했고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2주 만에 부산까지 점령해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소련의 호언장담은 그냥 나오지 않았다.

장면은 눈물겨운 호소로 유엔 17개국과 미군의 파병이 결정된 후에도 유엔 안보리가 열릴 때마다 참석해 한국 관련 안건이 잘 처리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 사회 단체 및 언론 기관에도 “전재(戰災)에 신음하는 한국민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해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장면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 외에 그해 9월 유엔 안보리에 출석해 “한국전쟁은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갖은 억지와 모욕적인 발언을 계속한 소련 대표 말릭을 향해 40분 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 내면서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했다. 장면 스스로 “내 생애를 통해 가장 잊지 못할 후련한 연설이었다”고 할 정도로 명연설이었으며 전 세계에 그대로 중계돼 “참 통쾌한 연설이었다”는 격찬을 받았다.

장면의 이런 활동은 훗날 ‘하느님의 종’이 된 누이 아네타 수녀에게 북한 당국의 지명 수배가 떨어져 결국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했다. 평남 평원군 송림리 공소에 숨어 있다가 그해 10월 4일 체포돼 처형된 누이를 생각하는 장면의 마음은 언제나 애틋하다.

“통일 없는 휴전으로 매듭이 진 조국의 숙명이 슬프기만 하다. 그리고 나의 외교 활동과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에 북괴의 지명 수배에 걸려 억울한 최후를 마친 누이동생 정온의 얼굴이 가끔 떠오른다.”

전세는 역전돼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10월 26일에는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했다. 그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1월 6일 중공의 월경(越境)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에 진입했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그 무렵(11월 23일) 장면이 국회에서 148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돼 “즉시 귀국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이 시작돼 중공 문제가 유엔에서 마무리되면 가겠다”고 보고한 뒤 1ㆍ4 후퇴로 정부가 부산 임시수도로 옮긴 뒤인 다음 해 1월 28일 귀국해 2월 3일 취임했다. 유엔 총회는 2월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장면은 그해 5월 22일 교황청으로부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으로 ‘성 실베스테르 기사 훈장’(Knight Commander of Order of St. Sylvester)을 받았다.

장면의 귀국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국회 인준 과정에서의 일방적인 지지가 화근이었다. 이승만은 악화된 국회와의 관계를 중재해 줄 조력자로 장면을 지명했으나 국회 인준 투표 후부터는 강력한 경쟁자요 정적(政敵)으로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장면은 당시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지도자로 부상해 있었다. 특히 미국은 이승만 이후 한국을 이끌 정치 지도자로 장면을 지목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후 점점 독선과 독단 독재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미국 정책과 다른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5ㆍ30 총선거로 구성된 제2대 국회가 개원한 지 6일 만에 6ㆍ25 한국 전쟁이 터지자 ‘서울 사수’ 담화를 발표해 믿었던 의원 35명이 사망하거나 납북되었다. 이 대통령의 기만적 정치 행위와 독재화 경향에 반발하는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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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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