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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북녘 본당] 6·25 전 북녘 교회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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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으로 멈춰버린 침묵의 교회 되살리자

70년 망향의 아픔은 이산가족만이 겪은 고통은 아니었다. 교회 또한 분단의 아픔을 ‘눈물로’ 감내해야 했다.

1950년 6월 27일 6ㆍ25전쟁이 개전한 지 이틀 만에 평양교구 비현본당 주임 김동철 신부가 연행돼 행방불명되면서 북한 전역의 가톨릭 교회는 ‘목자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5년간 북녘의 해방 공간은 공산 정권의 ‘박해’로 점철됐으며 불법 연행과 행방불명 교회재산 몰수 체포 투옥이 자행됐다. 끝내는 숱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의 순교로 이어졌으며 북녘 교회는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기에 북녘 가톨릭교회 교세나 현황은 해방 직전인 1944년 말의 기록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 전체 신자 수는 8개 교구 19만 명이다. 이 중 북녘 신자는 5만 2097명으로 한국 교회 전체 신자 수의 27.4를 차지했다. 서울대교구가 관할하는 황해도 지역이 20개 본당에 1만 2853명이었고 평양교구가 21개 본당에 2만 84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함흥교구가 10개 본당에 5474명 덕원자치수도원구가 4개 본당에 5370명 순이었다. 이 밖에 춘천교구 미수복 지역에도 2개 본당이 있었지만 신자 수는 미미했다. 이를 모두 합치면 북한 전역엔 57개 본당에 5만여 명의 신앙 공동체가 복음화에 투신하고 있었다.

이처럼 선교에 열심을 보이던 북녘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은 1946년 3월 단행된 ‘토지개혁’이 시초다. 종교단체가 소유한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소작제 철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으로 당시 북한 전체 토지 100만 325정보 중 1만 4401정보에 달했던 천주교회의 토지가 모두 몰수당했다. 전교의 물적 토대가 붕괴한 것이다.

이어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뒤부터 북한 공산 정권은 노골적으로 천주교회를 박해한다. 1949년 5월 10일엔 덕원자치수도원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 등이 연행되면서 덕원수도원과 신학교가 폐쇄됐고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교구에서 총 67명에 이르는 신부와 수사 수녀가 체포됐다. 이에 항의하던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마저 1949년 5월 14일에 납치 평양인민교화소에 가뒀다. 당시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자강도 일대 수용소에서 오랫동안 기아와 추위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사망하거나 중병에 걸렸고 일부 외국인 성직자나 수도자만 한국전쟁 뒤 본국에 송환됐다.

이로써 북녘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1988년 평양에 장충성당이 세워지고 조선천주교인협회(1999년 조선카톨릭교협회로 개칭)가 결성돼 ‘표면상으로는’ 교회가 다시 싹을 틔웠다. 그러나 3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북녘 교회는 여전히 ‘목자 잃은 공동체’로만 존재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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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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