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톤즈, 부활을 꿈꾸다] (4) 이태석 신부의 발자취를 좇아서

파더 존 리는 톤즈에 살아있다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파더 존 리는 톤즈에 살아있다

▲ 살레시오회 톤즈 공동체 수도원 벽에 걸려 있는 이태석 신부 그림. 그린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 이태석 신부의 진료실. ‘CONSULTATION ROOM DR. JOHN LEE’(닥터 존리의 진찰실)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 이 신부가 머물렀던 수도원 지붕에는 이 신부가 설치한 태양열 집열판이 있다.


▲ 이 신부가 사용하던 낡은 묵주.



톤즈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3명 중 2명은 ‘파더 존 리(이태석 신부)’ 이야기부터 꺼내며 반가움을 표현한다. 그가 톤즈를 떠난 지 7년이 넘었지만, 이 신부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의사, 음악가, 모두의 친구


사람들은 이 신부를 ‘뛰어난 음악가’이자 ‘의사’, ‘모두의 친구’로 기억했다. 수단어린이장학회가 파견해 지난해 가을부터 6개월 동안 톤즈에서 봉사자로 활동했던 김동길(요한 사도, 26)씨는 “톤즈 사람들은 신부님을 엄청나게 많은 재능을 가진 분이라고 기억한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만난 사무엘 아루(23)씨는 “많은 환자를 치료해 준 위대한 의사였다”고 말했고, 옆에 있던 어거스틴(17)군도 “신부님은 아파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봐주셨다”고 기억했다. 브라스밴드 단원인 마고트(22)씨는 “신부님은 우리와 늘 함께했던 친구”라고 말했다.

톤즈에는 이 신부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그의 발자취도 남아 있다. 이 신부가 직접 조감도를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어서 지은 병원은 지금도 ‘존 리 하스피틀’(John Lee Hospital)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신부가 환자를 만났던 진찰실 문에는 ‘CONSULTATION ROOM DR. JOHN LEE’(닥터 존 리의 진찰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진찰실 앞 벽에 걸려 있는 낡은 액자 속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이 신부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1분 정도 걸으면 이 신부가 톤즈를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수도원 건물이 있다. 지금은 MSMHC(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선교 수녀회) 톤즈 공동체 수녀들이 사용하고 있다. 아담한 수도원 지붕에는 이 신부가 전기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태양열 집열판이 있다.

이 신부가 머물렀던 방은 지금 한 수녀가 사용하고 있다. 6~8㎡ 정도 돼 보이는 작은 방이었다. 낡은 침대와 탁자, 캐비닛이 놓여 있었고, 방 한편에 허름하고 좁은 욕실이 있었다. 이 신부가 사용할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수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공 고미노(살레시오회, 76) 수사는 1년에 2~3차례씩 톤즈를 찾아 이 신부를 만났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수도원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공 수사는 “이 신부가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후원을 받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신부님을 좋지 않게 보는 시선도 일부 있었다”면서 “이 신부가 ‘나는 정말 좋은 뜻으로 한 건데…’라고 속상해하며 눈물을 보인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샨티(MSMHC) 수녀가 수도원에 남아 있던 이 신부의 묵주와 사진을 꺼내 보여 줬다. 얼마나 많이 묵주기도를 했는지, 십자가 상에 붙어 있던 예수님 상이 떨어져 있었다.

수도원 문을 열고 나와 오른쪽으로 열 발자국 정도 옮기면 이 신부가 회원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던 작은 경당이 있고, 제대 뒤편 벽에 이 신부가 직접 그린 성화가 있다. 가시관 쓰신 예수님 얼굴인데 무척 잘 그렸다. 톤즈 사람들이 ‘재능이 많았던 분’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악기 연주, 노래, 진료, 미술, 수학(교사)까지 정말 못 하는 게 없었다.



울지 않는 딩카족을 울린 이태석 신부

경당 옆에는 이 신부가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곤 했던 강당이 있다. 이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 그 강당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신부의 장례 미사 영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공 수사는 “20년 넘게 수단에 살면서, 이곳 사람들이 눈물 흘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용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멀쩡한 앞니까지 뽑는 딩카족은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이 신부는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라이촉’ 마을을 틈틈이 찾아가 환자들을 진료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이 신부의 진료를 도왔던 미리암(살레시오수녀회) 수녀는 “신부님은 처음 한센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한센인들은 무척 사랑했던 신부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3월 14일 돈보스코 라디오 방송을 찾았을 때 두 청년이 다가와 “한국에서 왔느냐?”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2007년부터 브라스밴드에서 활동했다는 알비노(22)씨는 이 신부에게 배운 한국 가요 ‘사랑해’를 능숙하게 불렀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옆에 있던 로나도(22)씨는 “나는 ‘아리랑’을 가장 좋아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알비노씨는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두가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면서 “톤즈 사람들을 정말 많이 사랑해 주셨다”고 기억했다. 로나드씨는 “신부님을 만나고 삶이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님 덕분에 많은 한국 사람이 톤즈를 알고 있다”고 말했더니, 두 사람은 “신부님 덕분에 톤즈에서도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활짝 웃었다.



이 신부는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 주고 싶다”고 소망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수단어린이장학회 오이화(실비아) 이사는 “이태석 신부님은 암 투병 중에도 ‘톤즈로 꼭 돌아가고 싶다. 톤즈에 갈 수 없다면 케냐까지라도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면서 톤즈를 그리워하셨다”고 말했다.

후원 문의 : 02-591-6210 수단어린이장학회

글ㆍ사진=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6-04-14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7

신명 7장 9절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