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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5> 초기 성모병원 모습과 발전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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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초기 성모병원 모습과 발전의 원동력

▲ 초창기 성모병원 외과 수술 장면.

▲ 성모병원 입원 환자에 대한 병자 영성체 장면(1937년).

▲ 1937년 성모병원 개원 초기 의료진과 직원. 점선 안이 라리보 주교(오른쪽)와 박병래 원장.



1936년 5월 11일에 성대한 개원식과 함께 문을 연 성모병원은 실상 24개 병상 규모의 조그만 2층 목조건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성모병원은 개원하자마자 교회 안팎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하루가 다르게 병원의 모습이 변해 갔다. 무엇보다 명동성당이 올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외래로 방문하거나 입원해 있는 환자들에게 더 없는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몸이 아파서 성모병원을 찾는 사람 중에는 그가 천주교 신자건 아니건 진료 후에 명동성당까지 들러 기도로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성모병원은 저렴한 진료비와 의료진들의 친절한 보살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경성 시내에서 가장 우수한 병원 중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래 환자가 100명을 넘었고, 입원실도 항상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박병래 원장을 비롯한 직원 모두가 환자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돌보았기 때문이다. 입원 환자들의 급식을 위한 김치도 수녀들이 직접 배추를 사서 담그는 등 환자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성모병원과 함께 병원 구내에 별도로 개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무료 진료소를 찾는 환자도 크게 늘어갔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1977년부터 시행된 정부의 의료보호제도 정책에 의해 경제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의료비 부담 없이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모병원 개원 당시에는 그런 공적인 의료보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원 초기부터 가난하고 불우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선 진료를 중요한 일로 생각했던 성모병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성모병원은 이렇게 자체적으로 무료 진료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1954년에는 서울역 뒤 중림동에 성 요셉 자선병원을 개설했고 1964년에는 새로 신축한 성모병원 부속으로 별도의 무료 진료소 건물을 확보하는 등 교회의 자선 의료 정신을 꾸준히 이어갔다. 성모병원의 이런 자선 의료 활동은 처음 교구 차원의 의료 사업을 계획했던 박병래의 강한 의지가 담긴 일이기도 했다.



박병래의 모범 - 열과 성을 다한 진료 활동

개원 당시 성모병원의 의료진은 원장 박병래를 포함한 의사 4명과 일본인 약사 1명, 간호사 10명(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 9명 포함) 등 총 15명이었고 주 진료 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다. 진료를 위한 공간은 좁았지만, 박병래는 특히 2층에 조그만 경당 즉 기도실을 설치하여 의료진이나 환자들이 수시로 들러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목(院牧)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아침, 그는 외래환자 진료를 앞두고, 그리고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을 회진하기 전에 자신의 방에서 반드시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는 모든 직원이 그의 깊은 신앙심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모두가 굉장히 바빴습니다. 그러나 직원들 사이에 우의(友誼)도 두터웠고, 한 가족처럼 일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모든 의료진이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보기도 했지만, 환자들도 우리 의료인들을 진심으로 신뢰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박병래 원장님의 자상하고 부드러우신 마음씨와 깊은 신앙심에 모두가 감동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박병래와 함께 일했던 어느 후배 의사가 뒤에 성모병원 초기 활동에 대한 회고담에 남긴 글이다.

박병래는 시간만 나면 입원한 환자들을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했다. 병원 일 말고도 교회 일이나 사회단체 일이 많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퇴근을 하고도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하고 시내에서 일을 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꼭 병원에 다시 들려 입원 환자들을 찾아보곤 했다. 환자들이 좋아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원장 박병래의 밤늦은 시간 방문은 환자들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었고 환자들이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당시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집에서 임종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박병래는 종종 환자를 집으로 찾아가는 왕진(往診)도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박병래는 함께 가는 간호 수녀에게 꼭 대세(代洗) 준비를 하도록 했다. 한 사람이라도 천주교 신자를 만들려는 박병래의 선교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박병래와 성모병원 생활을 함께했던 의사나 간호 수녀들, 그리고 일반 직원들이 지켜본 박병래는 오직 인술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참 의사였다. 병원 모든 직원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병원 간호 수녀들의 활동에 많은 환자가 감동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모병원을 ‘수녀 병원’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절하고 병원비도 싸다는 소문이 많아 더욱 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서는 아예 치료비도 받지 않고 약까지 지어주는 무료 진료소를 별도로 운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원장 박병래의 명성과 병원 전 직원들의 친절한 진료 때문에 성모병원이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갖고 찾아오게 되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병원을 설립한 교구는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교회의 자부심, 성모병원

100년이 넘는 교회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들을 제대로 도와주는 변변한 의료 기관 하나 없이 시약소(施藥所) 수준의 의료 시설을 운영해 오던 한국 천주교회가 비록 내과와 소아과 중심의 제한적인 진료이긴 하지만 입원 환자 진료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박병래와 함께 병원 설립 계획에 직접 참여하고 기금 모금에도 앞장섰던 교구 청년연합회 회원들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발간된 한 신문에 의하면 성모병원은 개원 첫해 8개월 동안 입원 164명, 외래 환자 8496명을 진료했으며, 다음 해인 1937년에는 그 수가 각각 232명과 2만 2194명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꽤 빈번했던 왕진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더 많은 수의 환자가 성모병원의 혜택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성모병원을 찾는 이들 환자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신자들이었다. 그만큼 당시만 해도 의료 활동은 교회가 외인들을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고, 이를 통해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 의료 활동이 교회 정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교회 관계자 모두가 실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성모병원은 교회 안에서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1938년 2월호 「경향잡지」를 보면 1936년과 1937년 2년 동안 성모병원을 통해 대세(代洗)를 받은 사람이 10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들 중 많은 수가 집에서 사망한 영유아(乳兒)들로서 당시는 전염성 질환과 영유아 사망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왕진 대세자’가 많았다. 왕진을 갈 때마다 위독한 어린아이들의 생명이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간호 수녀에게 꼭 대세 준비물을 챙기게 한 박병래의 속 깊은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진료기록이다.

박병래가 이끄는 성모병원은 그렇게 한국 천주교회의 자부심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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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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